영원한 '의인'이신 형님!

형님 돌아가셨다고 기자가 찾아왔길래 저도 명함 한 장 건넸더니, "전화번호가 옛날 번호네요. 010이 아니라 01×로 돼 있네요"라고 그럽니다. 깜짝 놀라 "내가 번호를 바꿨을 리가 없다"고 했는데, 전화를 걸어 보니 010으로 바뀐 게 맞네요. 저도 이제 팔순을 넘다 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하지만 010이든, 01×든 그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형님을 알고 난 후 절대 바꾸지 않은 제 전화번호 끝자리 '0325', 이것만 잊지 않으면 되는 것이죠. '영삼이오', 제 인생 자체가 '영삼이오' 아닙니까.

스물일곱 살에 형님을 처음 뵀었죠. 형님은 그때 최연소 국회의원을 지냈고, 제 경남고 4년 선배였습니다. 부산 서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셨을 때였죠. 형님의 연설을 듣는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꼈고, 형님과 함께 민주화의 길을 가야겠다고 운명처럼 다짐했습니다. 형님은 곧 '정의'였습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불의와 타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한번 결심한 일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반드시 실행하셨습니다. '민주화의 투사' 김영삼. 그러니 제가 형님께 평생을 바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1980년 군사정권이 형님을 서울 동작구 상도동 자택에 불법 감금했을 땐 진짜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형님도 저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죠. 저는 연말이면 집에서 몰래 형님 이름으로 엄청난 양의 연하장을 만들어 뿌렸습니다. 가족이 총동원돼 봉투에 풀칠을 했죠. 그걸 지금 제 아들이 기억하더군요. 그런데 연하장만으로는 안되겠는 겁니다. 그래서 서구를 중심으로 형님의 호를 따 거산(巨山)산악회를 조직했습니다.

어느 날 형님이 최형우 김동영 김덕룡 동지와 함께 고향 거제에 왔다가 서울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수영비행장으로 한달음에 갔었죠. 저는 다급한 나머지 등판에 '거산'이라고 엄청나게 큰 글씨가 새겨진 조끼를 입고 그대로 갔습니다. 형님이 물으셨죠. "종순아, 니 등에 그게 뭐꼬." 저는 대답했습니다. "지금 형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더 있습니까. 아무리 군부라도 산악회 가지고 뭐라 하겠습니까. 이왕 하는 거 형님 호를 한번 써봤습니다."

그로부터 보름가량 뒤 형님은 서울에서 민주산악회를 만드셨죠. 민주산악회는 형님을 대통령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부족한 동생의 마음을 형님이 읽어주셨습니다.

1983년인가요. 군부와 맞서 외롭게 싸우시던 형님이 23일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하실 때 제게 하신 말씀, 그리고 제가 드린 말씀이요. 병상에 누운 형님을 본 순간 눈물이 쏟아졌고, 울분이 터졌습니다. 정말 형님 돌아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말씀도 못하실 정도였죠. 다행히 저를 알아보시고는 힘들게 입을 여셨습니다. "종순아, 부산의 동지들은 잘 있나." 저는 그 말씀을 듣고, 형님의 앙상한 몸을 보면서 말했습니다. "형님과 생명을 함께하겠습니다."

저는 형님과의 약속을 지키려 평생을 서구에서 형님만 위하고, 그리며 살았습니다. 형님 역시 제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순간마다 증명하셨습니다. 기억하시나요. 꽤 유명했던 사건인데. 형님이 대권에 도전하시려고 중앙으로 올라가신 날. 저는 서구지구당에서 '민주 회복'이라고 쓴 풍선 300개를 하늘로 날렸습니다. 그 살벌한 시절에 난리가 났었죠. 여기저기서 조사도 많이 받았습니다. 형님, 이제 그 풍선 위에 편히 누워 하늘로 가십시오.

형님 따라 인생길 걷다 보니 저도 벌써 구십을 보고 갑니다. 네, 다 됐습니다. 지난 세월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한테 국회의원 배지 한 번 못 달게 해줘서 행여 미안한 마음 가지고 계신가요. 그러지 마세요. 그저 주변 사람들이 "고생했다. 욕봤다"고 얘기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형님 덕분에 즐겁게 살았습니다. 하늘로 떠나신 대통령님, 총재님, 서구당위원장님, 경남고 선배님, 그리고 형님. 지금 제 두 눈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 외에 제가 드릴 게 없습니다.

※이 글은 김종순 새누리당 부산시당 상임고문과의 인터뷰 내용을 본지가 추도문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김종순(82) 새누리당 부산시당 상임고문은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직직계'로 불린다. 일평생 YS맨으로, YS와 부부 사이라는 말까지 듣는다. YS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 서구에서 태어나 아직도 살고 있으며, 이곳에서 정치를 시작했고 대통령을 만들어냈다.

부산대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그는 YS의 경남고 후배다. YS가 1954년 사사오입 개헌에 반발해 자유당을 탈당하고 서구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때, 그도 '선배'를 도와 정치를 시작했다. 김 고문은 그 이후 단 한 번도 YS와 서구를 떠나지 않았다. YS와 함께 민주화의 길을 걸었고, YS의 임명으로 신민당 중앙당 당기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공동의장, 민주화추진협의회 발기인도 지냈다. YS가 대통령 후보로 나섰을 땐 YS 대신 서구위원장 직무대리를 맡았다. 3당 합당 이후 부산시당에서 초대 사무처장으로 일한 게 '월급 받고 한' 그의 유일한 당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