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 순행 수행했던 기억 사무치고
- 군도 날뛰는 나라 안전 우려에
- 끌린 듯이 해운포로 향한 발걸음
- 드넓은 바다 바라보며 생명 느껴

- 십여년 만에 다시만난 만호 부녀
- 앙심 품은 귀족·반란군 등 많아
- 유랑의 길 이어가는 치원을 걱정
- 만호 딸 무영, 곁 지키겠다 다짐

■다시 해운포 동백섬으로

	최치원은 날마다 기상을 새롭게 하는 해운대에서 나라의 안전과 자유를 꿈꿨을 것이다. 오늘 그 자리에는 안보와 안전을 위한 등대가 서 있다. 최치원이 쓴 ‘해운대 석각’은 등대 아래 위치해 있다. 김성효 전문기자 kimsh@kookje.co.kr

여왕의 순행을 수행했던 기억이 사무치니 치원의 걸음은 끌린 듯 해운포로 향한다. 붉은 동백꽃이 타오르던 섬으로 들어서니 걸음은 저절로 떠오르는 해와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리로 향한다.

굽은 길을 돌아서던 치원은 문득 걸음을 멈춘다. 저쯤 보이는 바닷가 그 자리에 무언가 세워져 있는 게 아닌가. 서둘러 다가가니 치원이 평소 즐겨 서던 곳과 주변을 비슷한 크기의 돌로 다져 놓았다. 여기에 따가운 햇살과 비를 가릴 수 있게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린 후 탁자와 의자가 될 수 있는 자른 나무 둥치도 몇 개 갖다 놓았다. 치원은 그중 하나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긴다.

양산을 떠나기 전 해인사에서 사람이 다녀갔다. 나라 도처에서 굶어죽거나 싸우다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즐비하더니, 급기야 사원(寺院)에까지 군도(群盜)가 쳐들어와 이를 막으려다 죽은 승려까지 있어 명복을 빌고 탑을 세운다며 기(記)를 지어줄 것을 청해온 것이다. 이에 치원은 ‘해인사묘길상탑기(海印寺妙吉祥搭記)’를 지어 보냈으니 진성왕 9년(895년) 7월이었다.

순하고 여린 백성들이 약탈과 굶주림에 오죽 시달렸으면 공경하는 부처님의 집에까지 도적떼로 쳐들어갔을까. 그럼에도 권력에 눈 먼 이들은 갖은 명분과 요설로 선동과 살육을 멈추지 않으니 마침내 승려가 창을 들어 절을 지키는 지경이 된 것이다. 소식을 듣고 단숨에 해인사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찾아온 이가 위험하다며 말리기도 했지만 절을 지키겠다 창을 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할 수 있고, 해야 하고, 그래야 나라의 내일을 기대할 수 있을 테니 인재를 기르자고 더욱 마음을 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급한 마음과 달리 그 터를 어디로 삼아야 할지 막막한데 바쁘게 다가오는 걸음이 느껴진다.

■자유롭게, 매이지 말라 했거늘

	고운 최치원이 쓴 ‘해운대(海雲臺) 석각.

‘아찬님! 고운 선생님!’ 머리는 희끗했으나 그 호탕한 음성만으로도 치원은 단번에 그때의 만호임을 알 수 있다. 뒤를 따르는 여인은 아, 만호의 딸이다. 무영, 이름도 기억난다. 십여 년 세월이니 이제는 소녀가 아니라 완연한 여인이다.

덥석 치원의 두 손을 아프도록 맞잡는 완력은 반가움을 주체하지 못함이고, 너털웃음은 금방 울먹임이 될 듯하다. “하하, 여기 계셨군요! 역시, 잊지 않아 주셨습니다. 꼭 그러시리라 믿었습니다. 여기 대를 쌓고 비를 막을 지붕을 얹으며 기다렸습니다, 하하하!” 치원은 가슴이 뭉클하다. 이런 이들이, 그 며칠의 인연으로…. 만호가 고개를 돌려 딸을 돌아본다. “기억하시죠? 저의 여식 무영입니다. 저길 보십시오.” 만호를 따라 눈길을 돌리니 지붕 아래 보로 삼은 나무에 빛바랜 붉은 천들이 매달려있다. “선생께서 저 아이에게 주셨던 댕기입니다. 언제 오실지 모른다며 똑같이 만들고 글을 써 머리를 묶었다가 한 해가 지나면 보에 묶고 다시 만들기를 십여 년이지요, 허허. 저 아이가 그리하면 반드시 다시 뵈올 수 있을 거라니 저도 그리 믿었죠, 하하하!” 치원은 황망하다 못해 기가 막힌다.

다소곳이 무릎을 꿇어 인사를 한 무영은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그 안에 곱게 간직한 댕기를 펴 보인다. ‘자유외경(自由外境)’. 자신이 지은 시 ‘해구(海鷗)’의 한 구절에서 딴 ‘갈매기처럼 자유롭게 매이지 말라’는 경구가 선명하다. “매이지 말고 자유로우라 했거늘 어찌….” 또 만호가 나선다. “그렇지요. 매달려 집착하지 않으니 잊으려 애쓸 일 없는 그게 자유로움이지요. 또 마음에 품어지니 굳이 뜻을 꺾지 않는 그것도 자유로움 아니겠습니까. 저 아이가, 아니 여기 해운포의, 범위를 넓혀 동래의 여인이, 사람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훨훨 자유로운 갈매기와 함께 산 사람들 아닙니까, 하하….”

■그림자 뒤에서 님 지키리라

만호는 한여름이니 집안보다 사방 열린 곳이 좋겠다며 무영을 시켜 그 자리에 상을 차렸다. 싱싱한 날생선과 생선새알탕에 나물 찬도 여러 가지니 술잔을 기울여도 취하지 않는다. 왕경에서의 일과 처지는 듣지 않아도 이미 아는 듯 앞날을 묻는 만호에게 치원은 육친의 정을 느끼며 마음을 연다. 아직 계획이랄 것도 없는 막연한 생각에도 만호는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튼 우리 동래군은 왕경과 밀접해 적당치 않을 듯하니 바닷길로 남쪽을 돌아보시지요. 황산강(옛 낙동강)을 건너면 바로 서쪽이 의안(義安)군인데 거기 합포현(合浦縣·지금의 마산)이 물산이 넉넉하고 인심이 푸근합니다. 제가 그곳까지 배로 모시겠습니다.” 평생토록 인근의 바다를 누볐을 그이니 치원은 고개를 끄덕인다. 만호는 잠깐 머뭇거리는 기색이더니 말을 잇는다.

“이제 이리 홀로 다니시는 건 위험할 듯합니다. 대왕께서 사직을 가납하지 않으시니 반감을 품은 귀족들이 무슨 짓이라도 할까 싶고, 무엇보다 반란군은 자신들의 명분을 선생에게 기대기를 원하고 있을 것입니다.” 반란 무리를 반란군이라 칭하는 것이 의아했으나 치원은 자신의 위험을 꿰뚫은 만호의 통찰에 쓴웃음을 짓고 만다. “이 시각부터 무영이 선생의 곁을 지킬 것입니다.” 치원은 당치 않은 소리에 휘둥그레진 눈으로 아비와 딸을 돌아본다. 무영은 무릎을 모아 꿇어앉고 만호는 결연한 표정이 된다.

“여인이 아니라도 존경하는 사모의 마음을 굳힌 아이입니다. 기어이 허락지 않으시면 선생의 그림자 뒤를 따르겠다 합니다. 이름도 그림자 없는 무영인데 그리 되면 너무 가엽지 않겠습니까.” 치원은 말문이 막히는데 무영은 바닥에 두었던 검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허리를 굽혀 맹세를 표한다. “거처하실 곳이 정해지면 왕경의 가족분들도 모셔야 할 텐데 어찌 하실 겁니까? 발 빠른 아이이니 안개 같은 행보에 요긴하실 겁니다.”

치원은 부녀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알지만 만호가 안쓰럽다. “부정(父情)이 사무칠 텐데 어쩌시려고….” 만호도 씁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맥없는 웃음을 흘린다. “허허, 이 아래 바위에 뭐라 글귀라도 남겨주십시오. 제가 깊이 새겨 고운님을 잊지 않고, 아비로서 여식을 자랑스럽게 기억하겠습니다.”

치원은 ‘해운대(海雲臺)’를 생각한다. 그저 고을 이름이어서가 아니다. 떠오르는 해로 날마다 청년의 기상을 새롭게 하는, 세상에서 가장 넓고 끝을 알 수 없는 바다, 높고 낮은 하늘 모두에서 유유자적 고귀하고 너그러운 구름, 뭇 생명과 자유를 하나로 품지 않는가. 그러니 해운(海雲)이다!

한 번이었는지 두 번이었는지 다녀간 기록 없이 오직 바위에 새긴 석 자 글뿐이다. 그래도 천년 세월, 수많은 이들이 그의 흔적에 의지해 찾아와 노래했다.

‘해 저무는 산비탈/ 하늘 멀리 외로운 구름 / 최유선(崔儒仙·최치원) 그 당시에 / 이곳에 머물면서 / 드디어 바닷가 / 싱싱한 이곳을 / 인간세상 제일의 / 기이한 곳으로 만들었다네.’ 조선의 윤순지(尹順之)가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오며 노래한 시 ‘래산만점(萊山瞞占)’이다.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