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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청학동 주민이
힘을 보태 지은 청학성당 본당 낙성식. |
- 1890년 프랑스인 죠조 신부
- 박해 속 기틀 닦은 발상지서
- 1932년 본당 설립승인 이후
- 민중·피란민의 삶과 함께해
- "격동기 역사궤적 살필 잣대"
부산 가톨릭의 발상지인 영도구 청학동 청학성당이 본당 설립 80주년을 맞았다.
청학성당은 1932년 본당 설립을 승인받아 범일성당에 이어 부산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성당이다. 그러나 청학동의 가톨릭 역사는 시간을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1890년 부산 본당의 주임 신부로 파견된 프랑스인 죠조 신부가 청학동의 첫 신부였다. 죠조 신부는 부산 시내에 본당을 설립해 전교 활동을 할 생각이었지만 시내 신자들을 잘 알지 못했고, 박해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시절이었기 때문에 청학동에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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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학성당
본당 설립
80주년 기념
감사 미사에서 신자들이
황철수 주교에게
성경 필사본
구약 2권과
신약1권을
전달하고 있다. 청학성당 제공 |
죠조 신부가 청학동에 부임한 것은 청학동에 이미 가톨릭 신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부 때부터 가톨릭을 믿었던 경주 양반가의 김보윤이 병인박해를 피해 신교의 자유가 있던 일본으로 가던 중 청학동에 은거했다. 김보윤이 선교 활동을 펼쳐 청학동에 있던 여섯 가구와 함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던 것이 청학동 가톨릭 역사의 시작이다. 이처럼 가톨릭 박해와 청학성당의 역사는 궤를 같이한다. 박해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영도가 안전한 섬이었던 점이 가톨릭이 성장할 수 있는 가장 큰 원인이었던 셈이다.
본당 설립 이후 청학성당은 굴곡진 민중의 삶과 함께했다. 일제 강점기에 야학을 개설해 우리말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며 문맹 퇴치에 힘썼으나 일본 헌병대가 민족의식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야학을 폐쇄하기도 했다. 6·25전쟁 중에는 청학성당 근처가 피란민의 거처가 되고 당시 구호물자의 72%를 담당했던 N.C.W.C(국제가톨릭복지협의회)의 구호물자가 성당을 중심으로 배급됐다. 1956년 지금의 성당을 지을 때는 전후의 궁핍한 생활에도 주민이 아껴둔 구호물자와 패물을 내다 팔고 직접 벽돌을 나르며 힘을 보탰다. 청학성당의 차공명 주임 신부는 "생명마저 위협받는 박해를 이겨내며 쌓은 신앙심이 헌신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청학성당은 지난 3일 본당 설립 80주년 기념 감사 미사를 열었다. 교구장 황철수 주교의 주례로 청학성당을 거쳐 간 사제와 수녀 그리고 신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 전 교우가 함께 6개월간 필사한 구약, 신약성경과 '청학성당 80년사' 책자를 봉헌했다. 차 신부는 "구한 말, 일제 강점기, 민주화 과정 등 가톨릭이 역사와 궤적을 같이 해온 때 청학성당도 그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격동기에 가톨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청학성당의 역사가 잣대가 될 것"이라며 "많은 이의 헌신과 공로로 지금에 이른 청학성당이 어떻게 더 발전된 미래를 열어갈지 고민하겠다"고 말했다.
청학성당은 80년 기념사업으로 전 신자 묵주기도 100단 봉헌, 성모상 가정 순례, 바자 등 다양한 행사를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