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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발전은 사회를 순식간에 바꾼다. 광고지에서 전화번호를 찾아 짜장면을 주문하던 게 불과 몇 년 전인데 이제는 스마트폰 터치 몇 번으로 주문과 결제를 한다. 기술은 늘 한 방향으로 흐르며 진보할까. 국제아카데미는 지난 27일 부산 롯데호텔에서 열린 19기 4주 차 강연 무대에 김시덕 전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를 초청했다. 김 교수는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전문가로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왔다. 이날 강연에서는 일본 에도시대 지배층의 정치적 판단이 서민의 삶과 기술 진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옛날 이야기하듯 풀어놨다.
김시덕 전 서울대 규장각 교수가 일본 에도시대 생활상을 설명하고 있다. 류민수 프리랜서
“현대 세계는 1905년 5월의 이틀 동안 쓰시마 해협의 좁은 물길에서 결정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김 교수는 최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약 100년 전 치렀던 러일전쟁 이야기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인도 작가 판카지 미슈라가 쓴 ‘제국의 폐허에서’의 한 구절을 인용한 김 교수는 “러일전쟁은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고자 벌인 전쟁 중 하나로 알려졌지만, 국제학적 관점에서는 중세 이래 비유럽 국가가 유럽 국가를 이긴 놀라운 사건이다”고 말했다. 무적인 줄만 알았던 유럽 열강이 동양의 섬나라 일본에 패하자 아시아 전역이 희망을 봤다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는 누구의 관점으로 바라보는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김 교수는 흔히 ‘평화로운 200년’이라 불리는 일본의 17~19세기 중반 에도시대를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에도시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장군이 에도(현 도쿄)를 중심으로 한 ‘막부’로 전국을 통일해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뤘던 시기로 큰 혼란이나 전쟁이 없던 시대다.
에도시대는 지배층에는 태평성대였으나 피지배층에는 아니었다. 김 교수는 “지배층은 농민들이 죽지도 않고 잘 살지도 않도록 주의하며 쌀을 더 많이 생산해 바치도록 했다. 오죽했으면 ‘농민과 참기름은 짜면 짤수록 더 나온다’는 말이 지배층 사이에서 회자됐겠느냐”고 설명했다. 에도시대 농민의 삶은 처참했다. 특히 신분이 낮은 여성과 어린아이에게는 더 가혹했다. 여성은 빈궁한 살림 탓에 시부모 봉양과 자식 양육 사이 선택을 해야 했고 낙태나 영아 살해·유기 행위도 흔한 일이었다.
서민의 삶이 이토록 고통스러워진 것은 정치적 판단으로 기술이 퇴보했기 때문이라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김 교수는 “무역·교류가 왕성했던 전국시대에 비해 에도시대는 외국 문물과 단절된 시기였다. 지배층이 자신의 권력을 자식에게 안정적으로 물려주기 위해 통상수교 거부 정책을 폈다”며 “전국시대에 대서양과 태평양을 횡단하는 선박을 건조할 수 있던 조선 기술이 쇠락하고 총이 사라졌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에도시대에 지배층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기술이 진보할 수도, 퇴보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빗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일본을 한국이 뒤따라가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 일본의 역사를 반면교사 삼아 한국이 나아갈 길을 개척해야 한다”며 “오늘날 자율주행이나 플랫폼 기술이 국제사회에서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지는 기존 시장지배자와 경쟁 과정에서 정부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 에 달렸다”고 갈무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