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나훈아가 얼마 전 고별 공연에서 “왼쪽이 오른쪽을 보고 잘못했다고 생난리를 치고 있다”며 제 왼팔에 대고 “니는 잘했나!”라고 외쳤다. ‘테스 형’처럼 이번에도 통할 거라 생각하고 질렀을 터인데, 때가 어떤 때인가. 12·3 불법 비상계엄 사태의 후폭풍으로 헌정질서가 무너진 시국에 민주 수호 세력을 비판한 건 사태 파악 안 되는 어르신의 망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딴은 문화계 어른으로서 한마디 하고 싶었던 듯 한데, 어른의 말은 아무나 하나. 나이깨나 든 분들은 웬만한 자리에서 한마디 하고 싶을 때, 자신이 하는 말이 나이만 든 어른의 말인지 지혜를 갖춘 어른의 말인지 생각하며 말을 고를 필요가 있다. 그래도 헷갈린다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된다.

살아온 인생 하니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몇 해 전 도보여행 모임에 가입해 산과 들을 걸을 때 만난 남자분이다. 그분은 공직 퇴직자로 나이도 많고, 활달한 성격으로 멤버들을 잘 이끌어 모임의 어른으로 존경받았다. 한번은 산을 타던 중 여자 멤버가 “혼자 여행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세상이 험해서 겁이 난다”고 하자, 남자 멤버가 “최 여사는 아무도 안 건드린다. 남자들도 눈이 있는데”라며 킬킬댔다. 최 여사를 비롯해 여자들 표정이 굳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서는 분이 그분이었다. “최 여사 같은 미인한테 할 소리요. 박 선생님은 예쁜 여자분만 보면 짓궂게 말씀하시는데 사춘기예요?”라고 부드럽지만 따끔하게 말했다. 최 여사가 웃는 낯을 하자 박 선생이 얼굴 붉히지 않고 최 여사에게 사과했다.

멤버들 사이에서 중재도 잘하지만, 그분은 인생 지침서가 될 조언도 많이 들려주었다. 다 아는 이야기를 과하게 늘어놓을 때는 맨스플레인(남자가 여자에게 잘난 체하며 아랫사람 대하듯 설명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으나 노파심에서 하는 어른의 말씀이려니 여기고 받아들였다. 가식적인 칭찬도 남발했는데 듣기 민망해하면 긍정적인 말을 자주 하고, 또 자주 듣다 보면 알게 모르게 그 말의 에너지가 좋은 기운으로 작용한다고 했다. 틀린 말 같지는 않아 그러려니 했던 그분 말이 거슬리기 시작한 건 몇 차례 거듭된 돈 계산을 겪고 나서였다.

도보여행이 끝나면 대여섯 명의 고정 멤버가 남아서 뒤풀이했는데 그분은 빼놓지 않고 술을 시켰다. 연세가 있어서 그런가, 항상 일본 사케를 시켰다. 식당에서 파는 사케는 한 병에 5만 원 정도로 가격이 셌다. 보통 네댓 병을 마셨는데, 여자들은 마셔봐야 사케 잔으로 한두 잔 정도고 나머지를 남자 둘이서 마셨다. 계산할 때는 돈을 똑같이 나눠서 냈다. 박 선생이 엔(N)분의 1로 하는 건 미안하다며 남자들이 돈을 더 내는 게 좋겠다고 하자 그분이 고개를 저었다. 회식에서 누가 더 먹었느니 말았느니 따지는 건 치사한 일이라며 똑같이 내는 게 공평하다고 했다. 덧붙여 공평무사의 덕목에 대해 길게 늘어놓았다. 공평무사의 뜻을 모르시나. 고개가 갸웃해졌다.

사람 마음이란 게 원래 그런가. 마시지도 않은 술값을 떠안는 뒤풀이를 몇 차례 거듭하다 보니 그분이 입에 달고 사는 좋은 말, 긍정적인 말들에 거부감이 일기 시작했다. 가식적인 칭찬 남발도 자기 돈 덜 내고 술 먹으려는 꼼수같이 보였다. 존경할 만한 어른의 말로 받아들였던 모든 말들이 나잇값 못하는 어르신의 잔소리로 들렸다. 결국 말이 아니라 삶이었다. 삶을 통해 드러나는 태도와 행동이 받쳐주지 않는 말, 진심으로 채워지지 않은 말은 자신과 타인을 기만하는 헛소리거나 공염불에 불과했다.

그러는 너는? 너는 얼마나 어른다운 삶을 살고 있는데? 어디선가 이런 빈정거림이 들려오는 것 같아 자백하자면, 나 역시 지혜를 갖춘 어른은 되어보지 못한 채 그냥 늙어서 죽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다. 그게 구체적인 걱정거리로 와닿으면서 나이가 부끄럽지 않은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됐고, 어른의 자격과 어른의 말에 대해 고민하며 이런 글이나마 끄적이고 있는 것이다. 워낙 말 같잖은 말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이라 어른의 말이 간절하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