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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후성유전이란 책임감 한 스푼

  • 국제신문
  •  |   입력 : 2022-11-03 19:50:16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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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미국 영화배우 앤젤리나 졸리가 유방 절제 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은 세간의 화제였다. 이 소식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며 회자된 것은 그가 당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스타여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유방암 가족력으로 인해 유전자 검사를 했고, 일반적으로 정상세포가 암세포로 진행되는 걸 억제하는 BRACA1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있음을 알게 됐다. 그 역시 향후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무려 87%에 달했다. 자신에게 너무나도 가혹하리만큼 불합리한 확률 게임에 순순히 응할 리 없었다.

19세기 다윈의 진화론을 시작으로, 멘델의 유전 법칙, 왓슨과 크릭의 DNA 모형에 이르기까지 20세기는 가히 유전학의 시대라 불릴 만하다. 새로운 세기의 시작과 함께 게놈 프로젝트는 인간 유전체에 대한 정보를 밝혀내며 유전학은 한 차원 진화했다. 앞선 사례처럼, 유전자 검사를 통해 미래 건강을 예측하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박탈하고, 운명에 순응하는 결정론적 세계관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동일한 유전자를 지닌, 일란성 쌍둥이 가운데 왜 한 명만이 특정 질병에 걸리는가’ 등의 물음에 기존 유전학 연구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 이처럼 유전자 너머에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혀내고 있는 연구 분야가 바로 후성유전학이다.

재밌는 사례가 있다. 꿀벌사회는 일반적으로 생식능력을 가진 한 마리의 여왕벌과 수만 마리의 일벌 그리고 소수의 수벌로 구성된다. 그렇다면 일벌과 여왕벌을 구분 짓는 것은 무엇일까. 유전적 측면에서 이 둘은 서로 다르지 않다. 오랜 연구들에 따르면, 결정적 차이는 자연수분 매개자로 생태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일벌이 꽃가루와 꿀을 소화해서 만드는 유백색의 로열젤리에 있다. 애벌레 시절, 이러한 로열젤리를 얼마나 섭취하느냐에 따라 이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DNA는 네 종류의 염기와 당, 인산기로 이뤄져 있으며, 매개체인 RNA를 통해 단백질이 생합성된다. 하지만 모든 유전자에서 단백질이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 발현 과정에서 스위치를 켜고 끄도록 조절하는 것이 바로 후성유전이다. 대표적으로 메틸기란 후성유전 물질은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즉, 동일한 유전자를 지닌 여왕벌과 일벌, 일란성 쌍둥이의 유전자 발현은 후성유전에 따라 발현 여부가 결정된다. 식습관 생활패턴 운동 스트레스 외부 환경 등 우리가 처한 모든 환경 요소들이 이러한 후성유전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런 후성유전 역시 세대를 거쳐 유전된다는 사실이다.

유전학의 발전으로 자기 유전자를 검사하여 치명적인 질환에 걸릴 가능성을 미리 타진하고, 최악의 상황을 예방할 수 있다는 사실은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후성유전의 관점에서 보자면 유전자는 우리의 지휘 아래에서 춤출 수 있다. 운명은 주어진 것에 불과하고, 그것을 재료로 어떤 요리를 만들지는 자신에게 달려있다.

유전은 ‘운명’이라며 낙담하는 이들에게 책임감 한 스푼을 선물하고 싶다.

신명희 동의과학대 바이오생명제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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