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란 게 참 묘하다. 일부러 만들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지만 뭇 생명 있는 것들처럼 스스로 생겨났다가 어느새 사라지기도 한다. 조선시대 부산과 한양을 오가던 길로 낙동강변을 따라 나 있던 양산의 황산베랑길이 그렇다. 4대강 사업으로 탄생한 자전거도로로 경부선 물금역과 원동역 사이를 지나면 옛길의 흔적이 보인다. 이미 길의 기능은 사라진 지 오래고 옛 기억을 떠올려주는 실마리 구실을 할 뿐이다. 그런데 10여 년 전 지리산둘레길과 제주올레의 탄생 이후 전국에 걷기 바람이 불면서 ‘순식간에’ 500개 넘는 걷기여행길이 새로 생겼다. 기초단체부터 광역단체는 물론 정부까지 나선 길 만들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이 가운데 가장 장기간에 걸쳐 대규모로 조성되는 것이 코리아 둘레길이다. 문화관광체육부가 주도해 2016년부터 7년에 걸쳐 제주도를 제외한 우리나라 동·남·서해안과 휴전선을 연결하는 총 4544㎞의 어마어마한 걷기 코스다. 10개 광역자치단체에 78개 기초자치단체를 지나는, 우리나라에서 조성된 걷기 코스로는 역대 최장 거리다.
코리아 둘레길이라는 이름이 생기기도 전 2016년 개통한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강원 고성 구간의 동해안 해파랑길에 이어 오륙도 해맞이공원과 전남 해남군 땅끝전망대를 잇는 남해안 남파랑길이 2020년 10월 개통했다. 이어 지난달에는 땅끝에서 인천 강화도를 잇는 서해안 서해랑길이 개통했다.
부산과 경남 전남에 걸친 남파랑길은 총 90개 코스 1470㎞로, 1800㎞의 서해랑길 다음으로 길다. 이 가운데 경남 지역은 동에서 서로 창원 통영 거제 사천 고성 남해 하동 7개 시·군을 지나는 총 653.3㎞의 42개 코스를 품었다. 남파랑길에는 개통 직후부터 많은 걷기 꾼의 발길이 이어진다. 이에 맞춰 문체부 공모에 선정된 경남의 통영시, 고성·남해군이 걷기 여행객을 맞기 위해 쉼터 운영과 걷기 프로그램 개발에 나섰다. 5인 이상 단체 가이드 지원, 완주 기념품 증정, 생태관광 치유 코스 운영, 점심 배달 서비스 등 걷기 여행객이 반길 만한 내용이다. 특히 지정 숙소 픽업 서비스는 걷기 여행객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맞춤 서비스로 두드러진다.
문체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지난해 발표한 ‘2020 걷기여행 실태조사’를 보면 선호하는 야외관광지로 걷기여행길이 50.4%나 차지, 공원 산 바다를 제치고 코로나 시대의 대표적인 여행지로 떠올랐다. 숙박시설로 호텔과 펜션 이용률이 올라가고 1인당 소비액도 전년보다 20% 이상 늘었다. 올해 발표한 ‘2021 걷기여행 실태조사’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1인당 소비액은 전년의 11만3776원에서 11만7101원으로 더 늘어났다. 또 응답자의 61.6%가 코로나와 관계없이 걷기여행에 나서겠다고 응답해 엔데믹 시대의 걷기 여행 수요 증가를 예상할 수 있다. 남파랑길 이용자의 85.7%가 여행에 만족했다는 설문 결과와 함께 걷기 여행 목적지를 선택할 때 고려하는 요인으로 자연경관의 매력성이 첫손으로 꼽히는 점은 빼어난 풍광의 남파랑길을 품은 지자체들에는 솔깃한 소식이다.
부산을 대표하는 걷기 코스인 갈맷길은 2020 걷기 실태조사에서는 제주올레에 이어 두 번째로 인기 있는 코스로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기초단체에 갈맷길 전담조직이 없고 예산마저 넉넉하지 않아 278㎞에 달하는 전체 구간의 지속적인 관리가 오랜 숙제다. 실제 해안을 따라가는 구간은 태풍과 바람, 염분 등의 영향을 받아 탐방로와 이정표가 훼손되더라도 예산이 편성되기 전까지 장기간 방치하는 일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전용 트레킹 앱 출시, 갈맷길을 활용한 여행상품,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대상의 역사·생태 프로그램, 여행굿즈 공모전 등 많은 시도를 한다.
남파랑길은 부산 갈맷길처럼 단일 광역단체의 사업이 아니라는 어려움이 있지만 꾸준히 여행객의 발길을 끌려면 지자체의 지속적인 관리와 도보 여행객을 위한 편의 제공, 체험 프로그램 유지 등 해야 할 일이 한 둘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걷기 코스가 걷기 여행객만을 위한 길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남파랑길이 도보 여행객에게는 남해안의 빼어난 풍광을 감상하는 여행 대상지가 되고 지역민에게는 마을과 마을을 오가고 일터로 나가며 일상을 영위하는 길이자 주민으로서의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걷기는 코로나 시대에 누구나 큰돈 들이지 않고, 사실상 그저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챙길 수 있는 일이다. 그런 만큼 남파랑길은 지역을 알리고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지역민이 일상에서 찾아 걷는 곳으로 만들어 삶의 질을 높이도록 하는 보편적 복지의 수단이 돼야 한다. 돈이 끊기면 길도 끊긴다는 말이 있다. 지자체의 관심으로 남파랑길이 오래 사람의 발길이 닿는 길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진규 편집국 부국장 겸 경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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