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당신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마음에 사랑밖에 없어”라고 고백한 적 있는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엔딩 내레이션이 그러했다.

우리는 숱한 사람들과 마주치며 살아간다. 그 과정에 삶의 전환점이 된 부딪힘이 있었던가? 그를 만나기 전과 그를 만난 이후의 자신이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달라져서 살아가게 된 계기가 있었던가? 타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의 어머니는 예수를 만난 이후로 삶이 바뀌었다고 말씀하셨다. 신이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그날 태종대에서 자살했을 거라고 했다. 그랬다면 나는 엄마 뱃속에서 이 세상으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작년부터 나는 ‘문화산책하는 날’을 기획 진행하고 있다. 매달 마지막 주 목요일 오후 7시에 경기 일산에 있는 ‘백마화사랑’이라는 공간에서 북콘서트를 열고 있다. 이달엔 이병률 시인이, 다음 달엔 문정희 시인께서 초대작가로 오신다.

5월 ‘문화산책하는 날-시가 있는 삶’의 초대시인은 문보영 정다연 최지은이었다. 그날 상처 품은 애잔한 자작시를 낭독한 최지은 시인이 객석을 향해 비밀을 드러내듯 말했다. “제가 처음 시를 쓴 날은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날이었어요. 병원 가는 심정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죠. 시를 쓰기 시작한 이후로 제 삶은 완전히 바뀌었어요. 삶의 작은 부분까지 사랑하게 되었거든요.”

작가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수적이다. 고독과 고립을 자처해야 할 때가 많다. 적막한 두려움 속에서 한 줄도 씌어지지 않는 절망의 순간도 감내하곤 한다. 폐허 같은 내면을 헤매다가 폭우를 만나기도 하고 한 송이 장미를 발견하는 날도 있다. 번뜩 섬광처럼 깨달음이 지나가기도 한다. 작가는 우울하고 이상하며 자폐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타인을 만나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이다. 이전의 자신은 죽고 작가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글 혹은 책이라는 텍스트로, 작은 낭독회 등으로 이 세상 끝 벼랑에 있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민다. 문학이 작가 자신이나 독자를 구원할 수 있을까?

초청장을 받았다. 잘못 온 게 아닌가 싶어 불안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파블로 네루다, 요세프 브로드스키, 옥타비오 파스, 시머스 헤니뿐만 아니라 내가 무척 좋아하는 앤 카슨, 엘렌 긴즈버그, 존 애쉬버리 등이 참석한 ‘제52회 국제시축제(52nd Poetry International Festival, Rotterdam)’에 나를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한국 작가로는 최초로 초대되었다고 했다. 심지어 왕복항공권과 숙식, 행사 수고료까지 제공한다니!

나는 망설이지 않고 참석을 확정했다. 6년 동안 일궈온 책방마저 접은 터라 의기소침해져서 책에 파묻혀 이따금 창밖을 보곤 했다. 정체 모를 답답함이 나를 짓눌러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팽창하던 즈음이었다.

기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또 다른 초청장이 도착했다. 독일 베를린에서 6월 17일에 개최되는 국제시축제(23rd poesiefestival, berlin) 개막식에서 시를 낭독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시인 각자의 모국어로 낭독함으로써 그 언어가 지닌 소리와 리듬, 파장을 느껴보고자 한다는 거였다. 전 세계에서 온 작가들과 베를린 시민 앞에서 단 몇 개국의(자메이카 스페인 독일 한국 에티오피아 우크라이나 페루) 시인들의 모국어가 울려 퍼질 것이다. 나는 한국어의 표준어 구사가 어렵다. 경상도 사투리 억양도 좋다고 생각한다. 한국말에 더해 한복의 아름다움도 자랑할 겸 당근마켓에서 한복을 샀다. 흰 저고리에 붉은 치마, 파란 고름이 있는 낡은 한복인데 공교롭게도 태극기 배색이다.

나는 6월 9일에 시작하는 네덜란드 시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한다. 나는 한국 문단에서 잘 알려진 작가도 아니고 변변한 상도 받지 못한 평범한 시인이다. 아시아 최초로 ‘전미번역상’을 받았지만 그 상금은 번역자들에게 주어졌다. 창작의 시간이 작가를 성장시키지만 작품이 작가를 이끌기도 한다. 올해 6월은 상상을 초월한 선물 같다. 내 인생은 시 쓰기 전후로 나뉜다.

김이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