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안대교를 달린다. 늘 잔잔한 파도 위를 달리는 기분이다. 햇살이 반짝이는 날에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에도, 차가 밀리면 밀리는 대로 잘 빠지면 또 그대로 상쾌하다. 멀리 빌딩들이 나를 향해 안겨 온다. 출근길이다. 아니, 책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책을 편집한 지 20년이 되어 간다. ‘文草’라는 국문학과 잡지를 편집한 일이 처음이었다. 그동안 많은 문학잡지를 편집하고 만들어 왔다. 이제는 책 속으로 매일 출근한다.

한 권의 책을 편집하고 만드는 일은 녹록지 않다. 오탈자를 수정하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각양각색의 문인들을 대해야 하고 천차만별의 작품을 읽어야 한다. 전체적인 틀도 잡아야 하고 세부적인 것도 놓칠 수 없다. 기획 편집 교정까지 꿰뚫고 있어야 하는 것이 편집일이다.

책이 나오는 날은 희열 뒤에 걱정이 도사리고 있다. 낯선 전화가 오면 겁이 난다. 혹시 책 편집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내가 실수한 부분이 있는 건 아닐까? 많은 시간 동안 해 온 일이라 면역이 생길 법도 한데 책이 나오는 날이면 늘 신경통처럼 도지는 일이다. 내게는 한 달에 한 번, 혹은 한 계절에 한 번 겪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작가에게는 특별한 것이고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책이 나오는 날에는 나는 늘 긴장 한다. 한번 활자화된 것은 돌이킬 수 없다. 책을 다시 인쇄한다고 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누군가는 그 작품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글자 하나 글귀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힘이 드는 일이지만 나는 이 일이 좋다. 책과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하다.

나는 많은 명작을 중학교 시절에 탐독했다. 손바닥만 한 삼중당 문고 책을 늘 가지고 다니며 읽었다. 수업 후 학교 도서관에서, 늦은 시간까지 집에서 책 읽기는 계속되었다. 한 장면만 한 장면만 더 하다가 어둠이 깔리는 것도 모른 채 글씨가 안 보일 때까지 읽었다. 그 덕분에 안경을 써야 했지만, 그때 읽었던 많은 글이 내게는 보물이다. 그리고 그 보물들 덕분에 책을 편집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며칠 전 국회부산도서관에 다녀왔다. 웅장한 건물이 나를 압도했지만, 책 냄새가 좋았다. 여의도 국회도서관과는 달리 대출이 가능하고, 어린이 자료실이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엄마와 함께 앉아서, 혹은 누워서 자유롭게 책을 읽는 아이들이 많았다. 흐뭇한 광경이다.

개관과 더불어 열리고 있는 기획전시에 따르면 임시정부의 지출 총액에 ‘도서비 2원’(지출 총액 약 1031원)이 책정된 기록이 있다. 그 어려운 시절에도 책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고 자랑스럽다.

이제는 다 커버린 아이들에게 읽어 주던 동화책을 나는 아직도 가지고 있다. 책에 대한 나의 집착이기도 하지만, 먼 훗날 책이 귀한 아이들을 찾아가 읽어주는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우울한 날,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하는 날, 많은 생각으로 어지러운 날, 그 동화책을 꺼내 읽는다. 동화책에 밴 아이들의 숨결을 느끼면서 내 마음을 비운다. 동화책이 귀하던 시절, 나도 아이도 아껴 읽던 책들이다.

그러나 이제는 동화책이 넘쳐난다. 가까이에 도서관도 많고 중고 서점도 많다. 손만 뻗으면 읽고 싶은 책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주로 외국 작가들의 번역 동화가 많았는데 요즘은 우리 작가들의 좋은 동화도 많다. 이수지 작가가 안데르센상을 받은 쾌거만 보아도 우리 동화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전자책, 오디오북이 종이책을 대신하는 시대가 왔다. 그래도 어린이날, 나는 아이들에게 좋은 동화책 한 권 선물하는 멋진 어른이고 싶다.

나는 책을 볼 때, 특히 문학잡지를 읽을 때 판권을 제일 먼저 보는 습관이 있다. 몇십 년의 편집 생활로 얻은 버릇이다. 책을 만든다는 것은 그 책을 읽어줄 독자를 염두에 두는 일이다. 심혈을 기울인 책은 독자가 먼저 알아볼 것이다. 작가는 물론이거니와 누군가에 의해 열심히 편집되고 만들어진 책, 많은 독자가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오늘도 책과 함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