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마다 개화 시기는 다르겠지만 부산은 봄꽃을 일찍 보여준다. 봄이 오면 집 주변 산은 치마를 두른 것처럼 온통 벚꽃으로 가득하다. 이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면 벚꽃 이파리가 먼 데서 날아와 옥상 여기저기에 떨어진다. 꽃잎이 유난히 많이 떨어지는 것을 보니 이번 주말이 지나면 뒷산 벚꽃은 다 지고 없겠다.

봄날이 가는 중이다. 씹어 볼 ‘옷고름’은 없지만, 가만히 앉아 노래 ‘봄날은 간다’의 ‘알뜰한 그 맹세’를 곱씹었다. 버티자던 그 맹세들.

요양병원에 입원한 엄마를 보지 못한 지 3년째 접어든다. 봄에 태어난 엄마가 생신을 홀로 보낸 지 여러 해 되었다. 엄마와 영상통화를 하며 ‘우리 같이 힘내자, 나아서 만나자’, 그 말만 계속 외쳤는데 엄마와 나는 ‘실없는 그 기약’만 남기고 봄날을 보낸다. 그래도 안다. 지금은 고통이라 느끼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아마 지금을 부럽다, 그립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2017년의 내 SNS를 보면 ‘영원히 올 것 같지 않은 6049’라 적혀있다. 엄마가 병원이 아닌 요양센터에 입소해 있을 때는 두세 달에 한 번씩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엄마가 대학병원 진료를 받기 시작하던 때에는 둘이 함께였다. 병원 앞 대형약국에서 율무차나 요구르트를 얻어 마시며 한낮의 햇볕을 무료하게 내다보곤 했다. 지금은 엄마 없이 혼자 와서 상담을 받고 약을 받는데 정신과 약이 있어서 외부 약국에서 약을 받을 수 없다. 병원 내부의 약국 앞에서 햇볕도 율무차도 없이 약을 기다린다. 그땐 그 시간이 좋은 추억이 될 줄 몰랐는데.”

그날 병원비 수납 영수증에 적힌 약국 대기 번호가 6049였다. 두 시간 이상 앉아서 전광판에 6049번이 뜨길 기다렸다. 글에서는 그 이전을 그리워했는데, 글 쓰는 지금은 그 시절이 그립다. 엄마 이름이 적힌 큰 약봉지를 들고, 낮에도 문 여는 치킨집을 겨우 찾아, 엄마가 먹고 싶다는 프라이드 치킨 냄새를 폴폴 풍기며 버스를 타던 그 시절.

이 SNS 글에 달린 댓글에 누가 이런 말을 남겼다. “에휴~ 이 작가 어머님 병이나 내 병이나~.” 그에게 나는 답글을 달았다. “선생님, 그러니 새로운 약이 나타나서 좋아질 때까지 버티시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그래, 악착같이 버텨야지~. ㅋㅋㅋ” 루게릭병과 싸우면서도 쾌활함을 잃지 않던, 작년에 돌아가신 고(故) 정태규 소설가다. 함께 악착같이 버티자고 했던 알뜰한 그 맹세는 어디로 갔는가. 정태규 소설가는 노래방에 가면 눈을 감고 온 마음을 담아 ‘봄날은 간다’를 불렀다. 그가 그립고 엄마가 보고파서 ‘얄궂은 노래’ 가사만 반복해서 생각한다.

그리운 소설가는 만날 수 없고 치매와 파킨슨병이 심화된 엄마의 몸은 이전처럼 나을 수 없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안 사람은,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마음’을 기다린다. 살아갈 나날은 많이 남았으니까. 표준국어대사전에 ‘살아가다’의 뜻은 이렇게 나온다. 1. 목숨을 이어 가거나 생활을 해 나가다. 2. 어떤 종류의 인생이나 생애, 시대 따위를 견디며 생활해 나가다.

그저 살아있기만 해서는 곤란하다. 죽을 때까지 남은 여러 나날이 있다. 이 나날들을 ‘견디며’ 지나가기 위해 나는 ‘살아간다’. 동구 2번 마을버스를 타면 어르신들은 헤어질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가입시다.” 처음에는 왜 자꾸 ‘가자’고 하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아마 ‘살아서 가보자’는 말이 아닐까. 꽃잎이 지면 벚나무에는 새잎이 돋아날 것이다. 새봄을 기약하며. 새로운 꽃잎을 맹세하며. 설령 그것이 헛된 희망일지라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세월호 사건 이후, 8번의 봄날을 한 번도 오지 않은 봄날처럼,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이 봄날을 살아서, 가기 위해 주말에는 팽목항에 다녀올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