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피어나는 꽃 중 사랑스럽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그 모양새가 탐스럽고 앙증맞거나 아니면 수수하고 볼품없거나, 그 향기 또한 코끝 싸하게 툭 쏘든, 아니면 수줍게 내밀한 여백만 남긴 채 감추든, 다 그 나름대로 이 세상에 존재를 내민 까닭과 그 존재 방식이 그 수만큼 숱하게 많을 것이다.

눈부신 봄날 아침, 아파트 경비실 옆 한 뙈기 쉼터에서 담배를 피워 문다. 조심스레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주위를 일별하다 문득 동백꽃을 발견하고 반색한다. 내가 은근히 좋아하는 꽃이라 더욱 눈여겨 살펴본다. 한겨울의 시련을 우직하게 버티는 끈기도 그렇거니와, 있는 듯 없는 듯 요란하지 않게 꽃망울을 느긋하게 터뜨리는 은근한 성정이나, 봄이 절정에 이를 무렵에 역시 있는 듯 없는 듯 통꽃으로 툭, 툭 떨어져 몸져눕는 모습이 우리네 삶과 죽음을 은유하는 듯해서 유독 마음에 든다.

해마다 이 무렵이면 나무 아래 선혈 낭자하게 몸져누운 꽃송이를 바라보며 비감에 젖어 읊조리곤 한다. ‘아, 언제 이렇게 꽃송이들이 온몸으로 몸져누운 거지?’ 그러고 보니 언제고 한번 그윽하게 눈길을 준 적이 없는 것 같다. 피는 때나 모습을 눈여겨 바라본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가는 모습 또한 애끊는 마음으로 바라본 적이나 있었던가. 하릴없이 바쁘게 종종걸음을 치다, 눈길 한 번 준 적 없는 무심함에 괜스레 미안한 마음을 거둘 수 없어 지레 겁을 먹기도 한다.

겨울에 꽃을 피운다 해서 ‘동백’이라 하지 않던가. 모든 나무와 풀들은 춘삼월에 꽃을 피우는데, 이 동백은 엄동설한부터 몽우리를 몽글몽글 맺어 봄에 꽃을 피우다가, 봄의 절정에 이를 무렵에 꽃송이가 몸져눕는 모습에서, 우리 삶의 어느 한 모습이 비쳐지기도 하고, 어느 때는 세상 떠나는 모습의 의연함과 결기를 깨닫기도 한다.

모든 초목의 꽃들이 다 사랑스럽지만, 나는 유독 이 녀석을 좋아한다. 얼마 전에 고성 ‘동시 동화 나무의 숲’ 숲지기인 B 선생이 내게 전화를 넣어 내 나무를 정해 이름돌을 새긴다며 어떤 나무가 좋으냐기에, 대뜸 ‘동백나무’라 일러 주었을 정도로 언제부턴가 이 녀석을 끔찍이도 좋아하게 되었나 보다. 살얼음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불관언 겨울을 관통하는 그 끈기와 결기가 의연하고 고고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이 녀석은 봄이 이울 무렵이면 맥없이 꽃을 떨군다. 다들 봄빛에 기지개를 켜며 꽃으로 벙긋벙긋 존재의 방점을 찍어대는데, 이 녀석은 그즈음에 소리 없이 툭, 툭 이별을 고한다. 오며 가며 동백나무 아래를 보면 빨갛게 몸져누워 널브러져 있다. 그 모습을 보노라면 처연한 느낌에 나도 몰래 비감에 젖는다. 꽃잎을 떨구는 품새가 요란하지 않고, 통꽃이라는 온 존재의 하중으로 몸을 눕히는 그 모습이 처연하다. 그 지는 모습이 사람의 끝 무렵과 닮은 데가 있다.

보고 싶고 그리운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존재의 흔적을 지울 때가 있다. 우리는 그런 존재의 무상에 넋을 놓는다. 보고 싶은 사람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상실감은, 또 얼마나 애틋하게 우리네 가슴을 저미게 하는가. 이 녀석이 바로 그렇다. 마치 지조 있는 선비가 간단없이 자신의 목숨을 단숨에 끊듯, 나도 그렇게 간단없이 생을 마감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 시인 영랑은 찬란한 봄날 모란이 지는 모습에 하냥 섭섭해 울었지만, 나는 무심하게 툭, 툭 존재의 흔적을 지우는 동백꽃 모습에서 올곧게 살아가는 선비의 결기를 배운다. 우는 게 아니라 끝의 단단함을 배우는 것이다. 삶을 구걸하지 말 일이다. 올곧은 자신의 신념이 흐려지면 단숨에 그 존재 자체를 스스로 지워 버리는 일을 간단없이 결행하는 지조 높은 선비의 선연한 결행을 배울 일이다. 그렇게 구걸이나 아첨 없이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갈 일이다. 그런 성찰과 사유를 동백에서 배울 수 있어 나도 모르게 녀석의 성정을 가슴 한켠에 품었나 보다.

그런데 올봄은 개화가 좀 늦다. 시절이 하 수상한 탓인지, 아니면 내 감수성이 무딘 탓인지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