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하게 사는 것은 좋은 일일까? 배트맨의 비장한 모습에 관객들은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비장함으로 무장하여 살아가는 것이 브루스 웨인 자신에게도 좋은 일일까? 비장함은 거친 것이다. 따라서 (비록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의 비장함에 찬사를 던지고 또 그가 비장한 모습을 보이길 기대하는 것은 사실 그를 학대하는 일이 아닐까?

부모를 잃은 브루스 웨인은 비장함에 중독이 되어 살아간다. 그에게는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를 상실한 슬픔이 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대신, 배트맨이라는 장엄한 자아를 만들어 그 자아로 도망친다. 그렇게 부모를 잃은 슬픔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진다. 그 슬픔을 느끼기가 버거워 배트맨이라는 자아로 자꾸 도망치는 그는 결국 그 자아에 중독되어 살아간다.

내게도 어린 시절 어머니의 상실이 있었고, 비장하게 살아가는 측면이 있어 왔다. 나의 어머니는 불안정한 사람이다. 지금도 그렇고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그랬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나는 어머니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에 잠겨 있었다. 어머니는 성실히 살아가다가도 어느 순간부터는 갑자기 모든 일을 손에서 놓으시고는 했다. 그러고는 먹는 것도 씻는 것도 제대로 않고 집에 누워만 계셨다. 그렇게 몇 달을 초췌하게 지내다가, 어느 순간 다시 일어나 또 몇 달을 성실하게 지내셨다. 그렇지만 나는 엄마가 언제 다시 모든 것을 그만두고 누워버릴지 불안해했다.

어머니는 폐인처럼 지낼 때 주로 거실에 계셨다. 하지만 가끔 거실에서도 안방에서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었다. 싸한 느낌이 들어 찾아보면 어머니는 불을 끈 깜깜한 화장실에 혼자 들어가 소리 없이 계시곤 했다. 그걸 볼 때면 나는 화장실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벌어져서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을까 봐 가슴이 쪼그라들었다.

브루스 웨인이 부모님을 상실하는 공포 아픔 슬픔을 느끼고 배트맨이라는 자아로 도피하고 그것에 집착했듯, 10대 시절의 나는 공부로 도피하고 공부에 집착했다. 나는 눈앞에 공부할 게 없으면 극심한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매 순간 공부할 거리를 찾아다녔다. 걸을 때도 식사를 할 때도 공부 생각을 했다. 엄마와 있을 때면 가슴이 쪼그라들어서 마음에 주름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공부를 할 때는 엄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일관된 진지한 태도로 공부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공부하려 할 때면 가슴이 속에서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모든 의욕이 사라지고 이유 없이 화가 나 소리를 지르고 책상을 내려치는 나를 발견했다.

오랜 고민 끝에 찾은 동아대 학생상담센터에서는 내게 슬프지 않으냐고 물었다. 상담사는 내가 울음을 미뤄 왔다고 말씀하셨다. 충분히 슬퍼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차동욱이, 지금의 차동욱의 내면에 아직 남아 있다고 했다. 그 어린 나로부터 계속 도망치며 사는 것은 지속 가능하기 힘든 일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이 괴로웠다는 것을 인정하고 슬퍼해야 할 때가 이제 찾아온 것이라고 했다.

10주 동안의 상담을 마치고 얼마 전 ‘더 배트맨’을 보게 되었다. 브루스 웨인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떠올랐다. 힘들고 슬퍼 보인다. 충분히 슬퍼하지 못한 아이가 너의 내면에 남아 있다. 그 아이로부터 계속 도망치며 살 수는 없다. 아직 울지 못한 그 아이는 충분히 슬퍼해야 성장할 수 있다. 내면의 어린 자신을 찾아가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아이는 충분히 울고 나면 성장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 아이의 슬픔으로부터 더 이상 힘겹게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된다. 너는 이제 배트맨이라는 비장한 가면에 의존하지 않아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배트맨으로서만이 아니라 브루스 웨인으로서도 세상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너의 그런 모습이 보고 싶다. 그러고 영화관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금세 알게 되었다.

그 말들은 내가 나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