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으로부터 들었던 전쟁의 참상, 끊이지 않았던 무장공비 뉴스, 독재정권 하의 공포 분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때문이었겠지만, 1970년대 말 나는 종종 우리 집이 폭격을 당하는 악몽을 꾸곤 했다. 한낮에 마루에서 가족들과 점심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창밖 하늘에서 포탄이 쏟아져 내리는 그런 무서운 꿈이었다.
어린 시절 악몽의 장면들이 40여 년 만에 다시 생생히 떠오른 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뉴스 장면 때문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유롭고 평화로운 일상을 누렸을 우크라이나의 도시들이 갑자기 러시아군의 미사일을 맞는 모습들, 아파트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파괴된 상황과 살상을 당한 사람들 그리고 그 옆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 마음속에서도 공포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러시아 정부와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내 친(親)러시아 지역인 돈바스의 평화 유지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추진으로 인한 러시아의 안보 위협 해소를 우크라이나 침공의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이런 요인들이 주권 국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력 침공을 밀어붙인 정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평화를 위해 전쟁을 시작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성립할 수 없는 모순적인 논리이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인간 사회에서 전쟁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했다.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 현상에 적용한 ‘사회진화론’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에서 유행했고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원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나타난 제국주의와 나치즘, 그리고 전쟁과 인종차별 등이 모두 이러한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그 결과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이러한 전쟁들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1914-1918년 사이에 진행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사람은 무려 1700만 명으로 당시 전 세계 인구의 1%에 해당했다. 1939-1945년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은 더욱 처참한 결과를 낳았는데 사망자만 해도 약 5000만~7000만 명에 달했다.
2차 대전 이후 인류는 평화의 중요성에 공감했다. 하지만 전쟁은 세계에서 끊이지 않았다. 국가들은 국익이나 집권자의 이익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특히 강대국들은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했다. 따라서 실제 평화를 얻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은 감상적 차원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했다. 국제사회에서 전쟁을 막고 평화를 얻기 위한 움직임은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이뤄졌다.
첫째, 국제연합(UN)과 같은 국제기구를 통한 집단안전보장 체제 구축이다. 개별 국가의 안보 문제를 모든 국가의 집단적인 공통 관심사로 두고 평화 유지를 위해 공동 대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제기구를 통한 집단안보 체제는 국가들 사이의 입장이 다르면 실제 작동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존재한다. 둘째, 세력균형을 통한 평화 유지이다. 유럽의 경우, 나토(NATO)는 사실상 미소 양극체제 하 세력균형의 산물이다. 그러나 20세기 말 소련 붕괴 후 미국의 단극체제 하에서 나토는 해체되지 않았다. 셋째, 지역통합을 통한 평화 정착이다. 국경을 뛰어넘어 경제적, 사회적 통합 그리고 정치적 통합까지 이뤄내 유럽의 평화를 정착시킨 유럽연합(EU)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서 보듯 회원국 사이의 갈등과 분열은 언제나 재연될 수 있다.
동아시아는 유럽과는 달리 냉전이 완전히 해체되지 않아서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분단 상황도 여전하다. 동아시아에서도 그동안 평화 정착을 위해 다양한 구상이 존재해 왔다. 어떤 이들은 동아시아의 집단안보체제 구축을 주장하나 냉전이 완전히 해체되지 않은 상황에서 당장 현실성이 떨어진다. 어떤 이들은 냉엄한 현실을 지적하며 세력균형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들은 북한의 핵 개발, 중국의 군사력 증강이 동북아의 세력균형을 파괴한다고 보고 한미 동맹, 미일 동맹 강화 그리고 자주적 국방력 강화를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동아시아 지역통합을 통해 평화를 정착시키자는 목소리를 내왔다. 한·중·일 협력이나 남북한 화해 협력을 주창하는 것은 이러한 목표를 상정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문제는 우리에게 불구경하듯 할 남의 문제가 아니다. 관련 국가들과 지도자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국제관계의 현실을 냉엄하게 지켜보고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시사점을 얻어야 한다. 다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소식의 와중에서도 잊지 않고 마음으로 간직하고 싶은 장면들은 따로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에 반대하는 러시아 시민, 포로로 잡힌 러시아 군인들에게 빵과 물을 제공하는 우크라이나 시민의 모습이다. 국가를 넘어 평화를 만들려는 시민의 힘, 인류는 아직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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