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약병뚜껑을 열지 못해 식탁 위에 던져두었습니다. 그가 슬쩍 만지니 딱, 하고 뚜껑이 열렸어요. 종일 애를 써도 꿈쩍하지 않던 것입니다. 순식간에 떨어져 보란 듯 허공으로 포물선을 그으며 날아갑니다. 헤벌쭉한 입 같은 뚜껑. 저 작은 것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열어보겠다는 생각만으로 용을 썼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난 약물을 통증 속으로 부어넣으며 쉽게 저를 열지 않는 것들과 쉽게 열어 보이는 것들을 생각합니다.
이튿날 오른 손 엄지가 부어올랐어요. 움직이기 힘든 손가락을 붙잡고 통증으로 끙끙거리고 있을 때 셀폰이 흔들립니다. 오랜만에 듣는 지인의 목소리더군요. 무슨 할 얘기가 있는 사람들에게선 느낌이 옵니다. 머뭇거리거나, 지나치다 싶을 만큼 목소리가 높고 빠르거나, 평소와는 호흡이 좀 다르지요. 그럴 땐 그냥 응응, 하며 기다립니다. 처음엔 이런 저런 변죽만 울린다 싶지만 기다리면 핵심이 쏟아져 나오니까요. 진짜배기는 항상 마지막에 나오는 법이잖아요.
내 얘기 좀 들어 줘, 하는 지인들이 가끔 있습니다. 힘들 때 긴급하게 생각나는 사람이 나라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지요. 그땐 무조건 한 편이 되어줍니다. 그들은 끝까지 자신의 얘기를 다 풀어낸 뒤 조용히 흐느끼거나 큰 숨을 몰아쉽니다. 대개는 얘기를 하는 중에 다시 살아납니다. 나는 내 얘기나 여타 세상 이야기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슬쩍 슬쩍 풀어냅니다.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는 것이 답일 수 있으니까요.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은 때로 길잡이가 되기도 합니다. 힘들고 아팠던 순간들을 어떻게 건너왔는가, 어둑하고 질척한 얘기를 듣는 동안 이미 자신의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방안을 알아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나, 뚜껑 열렸어” “나, 뚜껑 닫혔어” 긴급 상황을 알려올 땐 더 이상 어떤 말도 소용없지요. 달려가 살아있다는 고마움과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나눕니다. “내 곁에 너 있고 네 곁에 나 있어” 큰 소리도 쳐줍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병은 본인은 물론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습니다. 한동안 소식이 없던 지인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담담하게 그동안을 풀어놓으며 먼 곳을 바라보는 눈빛이 동굴보다 깊어보였습니다. “몇 번이나 시도를 했어. 그때마다 실패했어. 병든 그 사람을 마지막까지 돌보지 못하고 시설에 맡긴 것이 너무 후회가 돼.” 서늘하게 웃는 그녀에게 말없이 바짝 다가앉았습니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지요. 누구나 겪을 일인데요.
정신분석을 공부할 때 선생은 그러셨지요. “힘든 이들의 이야기를 잠깐만 들어줘도 그들은 최악의 순간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들의 말을 놓치지 마라. 반대로 자신이 힘들 때도 누구에게든 전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보내라. 목소리만 들어도, 안부 몇 마디만 주고받아도 극단에서 비켜선다.”
그래서 난 웬만해선 지인들의 메시지를 놓치거나 허술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나 역시 힘들 때마다 그들의 도움으로 살아나니까요. 어딘가에 내 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합니다.
힘든 시절입니다. 자신을 닫아걸고 홀로 돌아앉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나 역시 스스로 왕따니 은둔자니 떠들고 있지만 어디로든 길은 열어놓습니다. 힘들 때 누구에게든 달려가거나 힘든 누가 달려올 수 있는 긴급 통로지요. 스스럼없이 열어주고 보여줄 수 있는 관계는 서로를 살리는 명약입니다. 명약은 의외로 멀리 있지 않습니다. 가까운 곳에 두고도 다만 알아채지 못하거나 외면하고 있을 뿐이지요. 약간의 관심과 애정이면 되는데요.
사는 일이 막막하거나 까닭 없이 눈물이 나오고 슬퍼질 때, 주저하지 말고 누구에게든 털어놔야 합니다. “나 힘들어. 죽을 것 같아. 나 좀 봐 줘. 급해.” 신호를 보내면 반드시 누군가는 달려옵니다. 문제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겉으로 명랑하고 쾌활한 듯 보이지만 아픈 속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행동일 수도 있으니까요. 거리낌 없이 자신의 아픈 바닥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도약할 힘도 있습니다. 더 단단한 계단을 놓을 수 있지요. 당신과 나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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