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지역에 사는 조카가 부산에 있는 한 대학에 합격했다. ‘새로 갓 들어간 사람’이라는 뜻을 품은 새내기. 어떤 일을 새로 시작하는 사람이라니, 아직도 들으면 설레는 단어다. 학기 중에는 기숙사에 들어가 지내기로 했지만 입학식 전의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러 오면 잘 데가 마땅치 않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하룻밤 지내기로 했다.

조카가 와서 하루 자는 일이 뭐 그리 대순가, 싶지만 남편 곰용 씨와 내겐 비상이었다. 집안이 난장판이었기 때문이다. 하필 이 시기에 나는 원고 마감이 여러 개 겹친 상황이었고 곰용 씨는 손을 삐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우리는 정리하고 치우고 쓸고 닦았다. 일 대부분을 손이 빠른 곰용 씨가 처리했다. 덕분에 집이 깨끗해졌고 덜컹거리던 문이 고쳐졌다. 새 이불도 사고 냉장고도 채웠다. 욕실에 들어서면 물기 없고 타일 틈새가 하얘서 시야가 선명했다. ‘오호, 이렇게 쾌적해진다고?’ 집에 들어선 조카에게 외쳤다. “자주 와라. 네가 올 때마다 이렇게 깨끗해지니 좋다!” 물론 속엣말까진 내뱉지 않았다. ‘이번처럼 내가 원고 마감이 있을 때 와라!’

오리엔테이션 가는 날 아침, 식사하다가 조카가 물었다. 숙모는 대학 다닐 때 어떤 배움과 활동을 좋아했느냐고. 아…, 활동이라. 나는 빵을 우물거리며 수줍게 대답했다. 난, 노는 거…. 옆에서 곰용 씨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술을 마셨지. 대학에 들어간 나는 무기력했다. 학과 공부가 썩 재밌지도 않았다. 동아리 활동도 하지 않고 그저 같은 과 사람들과 술을 마셨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나는 그 술자리에서 ‘의심하고 생각하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상한 질문을 하는 선배들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질문. “야, 이정임. 니는 여기 앉아있는 니를 이정임이라고 확신하나? 니가 이정임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래?” 세상에, 스무 살 인생 처음 겪는 시련이었다. 선배님은 혹시 ‘돌아이’십니까? 대학 새내기이자 술자리 새내기였던 나는 어른들의 술자리가 원래 이런 것인가 고민하며 질문을 곱씹었다. 여러 가지 대답을 했지만 모두 논리적으로 철저하게 반박당했고, 술김에 화가 나서 왜 내게 이런 고난을 안기느냐고, 뭘 그리 잘못했느냐며, 내가 이정임이면 안 되느냐고 서럽게 울기도 했다. 동시에 생각했다. 도대체 나는, 너는, 우리는, 누구란 말인가. 시트콤의 한 장면 같지만 이 엉뚱한 질문들은 훗날 소설을 쓰는 데 큰 거름이 되었다. 배움은 학과 공부 바깥에도 있었다.

김민섭 작가의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를 읽었다. 작가는 ‘대학 강의실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많은 질문을 했지만’ ‘나는 노동자이자 사회인으로서 잘살아가고 있는 건가’ 하는 질문에 답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곧 대학에서의 공부를 그만두었다. ‘대학 바깥에도 나와 연결될 사회가 있음을, 강의실과 연구실이 있고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누구든 나의 지도교수가 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65쪽)

새내기는 대학에만 있지 않다. 모든 연령대에, 모든 공간에, 모든 단체에, 새로 시작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만나는 사람이 선한 사람이면 좋겠다. 얼마 전 새로 시작한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수강생의 절반 이상이 예순을 넘겼고 그들의 절반이 대학 신입생이거나 새로운 배움에 도전한다고 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그 새내기의 표정이 지금도 떠오른다. 떠오를 때마다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응원하게 된다. 꼭 잘 되면 좋겠다고. 시작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사람은 태도가 멋진 사람이어야겠다. 잘 모르겠으면 청소라도 열심히 해야지.

봄에 벚꽃이 피면 꽃구경 가라고 휴강하는 교수님도 있다는데 맞아요? 조카가 물었다. 아, 학과 수업 바깥의 낭만을 기대하는구나. 분명 그런 교수님이 있을 거라고, 그 학교 주변에 걷기 좋은 곳이 많다고, 말했다. 조카에게 설레는 기운을 받았다. 배가 무척 부른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