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년 소의 해가 저물고 임인년 범의 해가 밝은지 벌써 두 달이 되어간다. 아끼던 양주를 한 병 까서 한잔 한잔 마시다 보면 금방 비워지는 그런 기분이 든다. 그만큼 지나가는 세월은 빠르다. 나는 신축년 생이라 한 갑자를 산 셈이다. 지난해에는 회갑을 기념한답시고 시집도 한 권 출간하여 약간의 보람도 있었다. 삶에서 보람을 찾는 것. 이게 사람 사는 순리고 이치가 아닌가 한다.

나는 소띠로 태어나서 그런지 소를 무척 좋아한다. 어릴 적부터 우리 집 마구간에는 사시사철 소가 있었다. 지금은 겨울의 기운과 봄의 기운이 뒤섞이는 2월이다. 이 무렵 소는 어떻게 지냈는지 문득 생각해 본다. 내가 기억하는 2월의 소는 마구간에서 되새김질하면서 큰 눈을 껌벅이며 편안히 쉬고 있었다. 나는 소를 만지기도 하고 소의 볼에 뺨을 비비기도 하면서 자랐다. 나는 이런 소를 위해 여러 일을 했다. 겨울이면 소죽을 끓이고, 여름이면 산이나 낙동강 가로 소를 몰고 나가 풀을 뜯겼다.

한 해가 지나 송아지가 태어나면 아버지는 송아지를 팔아서 학비나 생활비에 보탰다. 송아지와 이별한 어미 소는 한동안 큰 소리로 울었다. 큰 눈이 눈물로 축축이 젖어 있는 모습을 보며 같이 마음 아파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어느 해에 홍수로 흉년이 들어 가세가 기울면서 어미 소마저 팔게 되었다. 마구간은 비어 버렸고 일거리도 사라져 버려 나는 몹시 심심했다.

그 당시 소는 농사에 꼭 필요한 가축이었다. 소가 없으면 농사를 짓지 못해서 이웃집 소를 빌려다가 논밭을 갈아야 했다.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친지의 집에서 소를 한 마리 빌려 왔다. 우리 집 농사에 소를 활용하고 그 대신 잘 키워 주는 조건이었다. 뿔이 동그랗게 말려 머리를 향해 자라서 쇠톱으로 뿔을 잘라 주어야 했던 그 소를 키우며 어린 내가 양손으로 뿔을 잡고 이마를 갖다 대어도 들이받지 않고 콧김만 뿜어냈다. 커다란 덩치에 센 힘을 가졌지만, 함부로 쓰지 않아 그만큼 성미가 순했다.

몇 해가 지나 우리 집 형편도 나아져 소를 한 마리 사게 되었다. 이제는 남의 집 소가 필요 없어 돌려주려 하자 주인은 집에 키울 곳이 마땅치 않아 팔고자 한다며 아버지에게 오일장이 서는 날 우시장으로 몰고 와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이 일을 나에게 시키셨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소를 몰고 시오리나 되는 시골길을 걸어가던 그때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 소는 비록 남의 집 소였지만 나와는 정이 많이 들었다. 헤어지는 슬픔으로 발걸음이 무거워 터덜터덜 걸어갔던 기억이 난다.

우시장에 도착하니 소 주인과 소장수로 보이는 아저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를 넘겨주려니 어린 마음에 슬픔이 또 밀려왔다. 꾹 참고 소를 넘겨주자 주인인 아저씨가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흥정을 위해 아저씨와 소장수 사이에 몇 마디 말과 돈이 오갔다. 그 뒤 낯선 사람의 손에 이까리(고삐)가 잡혀 따라가던 소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이 기어코 나에게 눈물을 훔치게 했다.

아저씨는 소를 몰고 오느라 수고했다며 우시장 옆에 있는 중국집으로 나를 데려가 짜장면을 한 그릇을 사주셨다. 소와 이별한 후 먹는 짜장면이라 맛이 없어 절반 이상을 남겼다. 이별은 맛있는 음식의 맛마저 변하게 했다.

까마득히 생각나는 소와의 이별이 한 갑자를 산 지금도 잊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소띠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소와 정이 들어서 그랬을까? 소와 함께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해서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모두 다일까? 나에게 이별의 감정을 처음으로 느끼게 한 것이 소와 했던 이별 같다.

소의 해가 저물고 범의 해가 밝은지 두 달이 되어간다. 오는 세월은 또 다른 만남이고 가는 세월은 순리에 따른 이별이다. 가고 오는 세월은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다. 다만 우리는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다.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영원히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