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을 바로잡아야 한다. 가정(家庭)이 아니라 가정(假定). 가정은 사실이 아니거나 또는 사실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은 것을 임시로 인정함을 뜻한다. 가정은 논의의 대전제다. 대전제인 가정이 잘못이라면 이후 논의는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 가정이 잘못되면 문제해결이 안 된다.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는 ‘잘못된 삶 속에 올바른 삶은 없다’고 했다.
‘인간은 합리적이다’는 경제학의 기본 가정이다. 합리적 인간이라… 사람은 합리적이지 않다. 멀리 볼 필요도 없다. 자신을 돌아보면 합리성과는 한참 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존심을 조금 접으면 원만하지만 그것을 하지 않는다. 인내하면 더 나은 관계가 될 수 있음에도 버럭 한다. 성급하게 결정하고 믿는다. 과시하기 위해 소비한다. 심지어 기마이(돈이나 물건을 선선히 내놓는 기질)까지.
‘고대에는 교류가 거의 없었다’는 가정도 문제가 있다. 이 가정으로 인해 고대사의 많은 부분이 설명되지 않는다. 교류가 활발했다는 가정으로 전환하면 비밀의 상당 부분이 풀린다. 이병한 작가의 ‘유라시아 견문’은 이 같은 사실을 탁월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슬람과 그리스 문명은 활발하게 교류했고, 중국의 맹자사상이 1000년여에 걸쳐 서진(西進)한 결과 1789년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발발했다는 등의 주장이 그것이다.
‘공부를 잘하면 똑똑하다’는 가정은 오류다. 공부 잘한 멍청이는 널려 있고, 공부 못한 똑똑이 또한 흔하게 만난다. 똑똑함이란 몸과 마음의 기본값을 알고, 기대를 분산하며, 호혜주의에 기반하고, 좋은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의 속도에 마음의 속도를 맞추는 것 등이다.
‘넓은 인간관계가 좋다’는 가정도 바로잡아야 한다. 인간은 인간적인 사람을 좋아한다. 넓은 인간관계는 얇은 관계와 인간미가 없다는 말이다. 넓은 인간관계를 자랑하는 사람은 실질적인 도움이 안 된다. 어떤 부탁도 현실화되지 않는다. 우정과 애환과 도움을 나누는 깊은 관계가 우월하다. 우정과 애환과 도움 속에 삶은 인간적인 것이 된다.
‘시간이 없다, 바쁘다’는 가정 또한 오류다. 시간은 차고 넘친다. 시간은 어쩌면 감당키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가정도 오류다.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현재 처해있는 상황을 장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상황을 장악하지 못했을 때 일은 엉망이 되고 관계는 망가진다. 상황을 장악해야 순조롭다. ‘자유롭고 싶다’는 가정도 검토해봐야 한다. 떠돌이 노동자 출신 미국 철학자 에릭 호퍼(1902~1983)는 ‘맹신자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스로 무언가 해낼 재능이 없는 한 자유란 따분하고 번거로운 부담이다. 사람들이 대중운동에 가담하는 것은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자면, 열렬한 나치 젊은이의 말마따나 ‘자유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다.”
‘신문과 출판은 사양산업이다’는 가정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신문이 속보 경쟁인 한, 출판업이 책을 파는 일인 한 신문과 출판업은 사양산업이다. 그러나 신문과 출판이 탁월한 콘텐츠를 발견하고 그것을 산업화시키는 것으로 새롭게 정의되는 한, 신문과 출판업은 성장산업이다. 김구 선생은 1947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부산에는 없다, 부산에서는 안 된다’는 가정이야말로 바로잡아야 한다. 인구 330만 명 도시에 어찌 탁월한 사람과 내용이 없을 수 있는가! 사실 천지빼까리다. 단지 산업화의 길과 산업정책이 없을 뿐이다. 인류사의 중심부는 창조의 공간이 아니었다. 새로운 문명은 예외 없이 변방에서 솟아났다. 그리스와 네덜란드·영국·진나라·몽골·우리나라 대통령 등. 탁월함은 변방에서 출현했고, 변방에서 출현할 것이다.
신영복 교수는 ‘담론’에서 ‘변방이 창조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합니다’고 했다. 부산의 지정학과 부산 사람의 정서, 우정·의리·환대, ‘어서 오이소’, ‘함 해 보입시다’는 세계적이다. 주눅 들지 않고 나아가는 것, 산업화의 길을 내려는 노력, 문화산업정책을 요구하는 것. ‘생각은 잊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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