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에서 사법부의 상징으로 널리 사용되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는 대개 눈가리개를 한 채 오른손에는 칼을, 왼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필자의 ‘뇌피셜’에 따르면 여신의 지물(持物) 중 칼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저울은 이집트에서 각각 유래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서기관 인장 중 하나에는 태양신 우투(Utu)가 한쪽 손에 칼을 든 채 동쪽 언덕 위로 솟아오르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이 칼을 태양신이 일출 시 동쪽 언덕 양편을 가르는 데 사용하는 연장으로 본다. 그러나 필자는 이것이 동사 ‘나누다’, 즉 ‘판결하다’를 상징한다고 해석하고자 한다. 이집트의 레-호라크티(Re-Horakhti)나 아툼(Atum), 메소포타미아의 우투 혹은 샤마시(Shamash), 그리스의 헬리오스(Helios)나 아폴론(Apollon)과 같은 태양신들은 한결같이 하늘 위에 높이 떠 지상의 모든 사태를 파악하고 명명백백하게 밝히는 정의의 신이었다. 아울러 고대 사회에서 판결이란 ‘의로운 자와 의롭지 못한 자를 (칼로 자르듯) 나누는 일’ 이었다. 요컨대 고대인들에게 정의는 불의와 분리되고 구분됨으로써 실현되었던 것이다. 디케가 칼을 들고 있는 것도 동일한 발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고대 이집트의 내세관에 따르면 망자는 지하세계의 왕 오시리스(Osiris) 신이 다스리는 왕국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져 영생과 지복을 누리기 전에 반드시 심판을 거쳐야 했다. 이집트인들이 상상한 이 ‘최후의 심판’에는 저울이 사용되었다. 저울의 한 쪽 접시에는 이승에서의 망자의 모든 행위가 기억의 형태로 보존된 망자의 심장이, 다른 쪽 접시에는 우주적 질서와 사회적 정의인 ‘마아트’(ma’at)를 상징하는 타조 꽁지깃이 각각 놓였다. 만일 심장이 이승에서 저지른 죄로 인해 깃털보다 조금이라도 무거우면 망자의 혼은 영생을 누리지 못하고 저울 옆에 대기하고 있던 괴물에게 먹혀버린다. 이집트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존재의 완전한 종말이 찾아오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칼과 마찬가지로 공평과 조화를 상징하는 저울 역시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가려내는 정의의 도구였다.

고대 이집트의 문학작품 중 하나인 ‘말솜씨 좋은 농부’에서 주인공 농부는 억울한 일을 당한 후 관리를 찾아가 “토트(Thoth) 신의 저울이 기운 적이 있던가?”라고 항변한다. (토트는 심판에 사용되는 저울추를 조작하고 심판의 결과를 기록하는 지혜와 문자의 신이다.) 이후 저울은 황도 12궁의 하나인 천칭자리(Libra)가 되어 영원불변하는 신성한 정의의 불빛이 아직 사위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별자리로 박힌 이 천칭의 주인은 이치와 섭리의 여신인 테미스(Themis)의 딸 아스트라이아(Astraea)인데 이는 디케의 다른 이름이다. 기독교 문화권에서 저울은 사탄의 호적수인 대천사 미카엘의 지물 중 하나이다.

다시 디케로 돌아가 보자. 여신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칼은 ‘칼같이’ 냉정하고 단호한 결단, 그리고 그 결단에 따른 정의의 명백한 실현을 의미한다. 왼손의 저울은 어느 한 쪽으로도 사사로이 기울지 않는 공명정대함을 상징한다. 이제 눈가리개가 남았다. 여신이 눈을 가리고 있는 이유는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신화적 예언가인 테이레이시아스(Teiresias)와 기원전 8세기경 활약했다고 알려진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저자인 호메로스(Homeros)는 맹인으로 묘사된다. 이들은 육안을 잃은 대신 심안(心眼), 즉 마음의 눈을 얻은 현자들이다. 디케 역시 두 눈을 가림으로써 심안을 통해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고자 한다.

디케의 도상은 일부가 변형되어 대한민국 사법부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정의의 여신을 현대적 감각으로 형상화했다’는 이 상징에는 칼도 없고 눈가리개도 보이지 않는다. 오른손에는 칼 대신 법전이 들려져 있다. 칼을 책으로 대체한 것은 칼에 유난히 집착하는 이웃나라 때문일 테다. 그러나 사안을 두루 돌보지 못하고 법리만을 일방적이고 기계적으로 적용한 판결이 일반 시민의 법감정과 유난히 불화하는 것은 어쩐지 이 두꺼운 법전 탓인 듯하다. 또한 ‘이기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법기술자들이 행정부와 사법부의 권한을 농단하는 듯한 세태를 목도하면서 두 눈을 뜬 법리의 여신이 우리에게 들이밀고 있는, 디케로부터 계승된 유일한 유산인 저울도 허깨비처럼 보인다.

필자의 좁은 소견일지 모르겠으나 점점 ‘불멸의 신성가족’이라는 법조인들의 세상이 되어가는 듯하다. 하여 “위법은 아니다”는 말도 “존경하는 재판장님”들이 내린 판결들도 왠지 불온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그래서 4000년 전 불의에 대항했던 농부의 일갈을 다시 되뇌어 본다. “토트 신의 저울이 기운 적이 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