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는 잘 모르겠지만 유장(悠長)한 리듬이 좋다. 센 것보다는 여림이 좋고 빠름보다는 느림이 좋다는 말이다. 강물도 느릿느릿 흘러야 제맛이고, 바람도 세찬 것보다는 소소하게 불어야 제격이다. 호들갑스럽게 지는 벚꽃보다는 있는 듯 없는 듯 툭, 툭 비장하게 지는 동백꽃 잎이 미음에 든다. 차창 밖을 내다보아도 그렇다. 휙휙 스쳐 지나가는 풍경보다는 눈길 안에 지긋이 머물렀다 사라지는 그런 풍경이 좋다. 나한테만은 그렇다는 말이다.

지인들은 나더러 걸음이 참 빠르다고 한다. 일 처리도 남들보다 빠른 편이다. 매사 이런 모양이면 여유가 없어 필시 숨통을 트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내게는 남들은 잘 모르는 비장의 평형감각이 있어 균형을 잘 유지하는 편이다. 겉은 빠른데 마음과 영혼은 유장하다. 그 유장함의 원천은 독서와 글쓰기, 그리고 사유인 것 같다. 글을 쓸 때에도 머릿속에서 조몰락 조몰락 궁글리는 시간이 아주 길고 느린 편이다. 주제와 소재, 서사구조를 한데 어우러지게 뒤척이는 상상력의 연금술로 발효시키는 과정이 꽤 길다. 컴퓨터 앞에 앉기까지도 제법 망설이고 긴 편이다. 이렇게 숙성 시간이 길어도 자판에 손을 얹기만 하면 실제 쓰는 일은 일사천리로 후딱 해치우는 편이다.

유장함의 원천 중 또 하나는 영화 보기다. 나는 느린 화면 속에 사유가 녹아든 영화를 좋아한다. 일사불란하게 컷이 바뀌는 할리우드 상업영화보다는, 여운이 있고 사유할 수 있는 여백을 주는 유럽 예술영화가 좋다. 그저 시간을 때우는 현란한 서사구조의 영화보다는, 한 화면 속에 모든 것을 담아 관계성을 추론하게 하는 딥 포커스의 화면을 좋아한다. 그래서 사유의 힘이 돋보이고 유장한 리듬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허우 샤오시엔, 그리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작품들은 500여 편의 소장 목록 중에서 으뜸으로 등재되어 있을 정도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 상영 중인 어느 영화관 안이다. 주인공 알렉산더가 숲속을 유장한 리듬의 발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다. 한 컷의 길이가 10초를 넘기지 않는 빠른 템포의 할리우드 영화에 길들어져 있는 그에겐, 그 유장한 리듬의 롱테이크 화면에 좀이 쑤시다 못해 울화통이 치민다. 그는 잠시 자리를 비우고 화장실에 다녀온다. 제법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알렉산더는 아직도 그 숲길을 걷고 있자, 그가 “제기랄 아직도 그 장면이네” 하고 푸념을 늘어놓더란다. 그저 한번 웃어보자고 내 상상력이 지어낸 허구의 에피소드다.

얼마 전에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328분짜리 ‘해피아워’를 관람한 적이 있다. 특별한 서사도 아닌 일상풍경 속 자질구레한 에피소드의 영화인데도, 5시간 30여 분의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 버리고 마는 기이한 경험이었다. 영화 보기에서 물리적 시간은 그렇게 중요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경험이었다.

유장함을 좋아하는 내 취향은 결코 나이 탓만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물리적 시간이 빨라도 내면으로 느끼기에는 지루할 수 있고, 제아무리 현실적 시간이 길어도 심리적 시간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즉,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은 감정과 정서의 수용 태도, 받아들이는 쪽의 영혼의 감응 여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가변성이 크다.

나는 오늘도 빨리 걸으며 유장한 흐름의 강물을 바라보는 나만의 기이한 균형 감각을 누린다. 잎새에 느긋하게 머무는 바람도, 시나브로 지는 꽃잎을 바라보는 시간도 황홀하기 그지없다. 가끔은 빠른 내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 뒤에 느긋하게 풍경을 음미하는 시간도 애써 마련한다. 노자 ‘도덕경’의 물 같은 유장함이 좋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 드는 것도 애써 피하지 않은 채 즐기는 편이다. 여유롭고 느긋한 심리적 시간을 즐기는 햇볕 따사로운 날의 느긋한 행복이 마냥 좋다. 이 게으름이, 이 느림이 그저 좋기만 할 뿐이다. 빠른 걸음과 느린 사유의 이 역설이 마냥 좋기만 하다.

극작가·부산공연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