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중심이 이마에 부딪쳐온다.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잡동사니 생각으로 뒤죽박죽이던 뇌에 서늘하게 길이 뚫린다.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맑은 공기가 들어오는 것일까. 잡목 숲 같던 머릿속에 맑게 길이 벋어나간다. 웅크린 허리가 쭉 펴진다. 마음의 무게를 받아 얹은 자전거가 가을의 속도를 더한다. 이제 저 파란 하늘로 이륙할 시간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ET’에서 자전거가 땅 위만 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웠다. 바구니에 외계인 ET를 태운 소녀의 자전거가 보름달을 배경으로 하늘을 날아간다. 자전거가 하늘을 나는 장면은 달려가야 할 길이 때로는 바다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잡초와 자갈길을 불평하는 대신, 상상력의 공기펌프를 자전거 타이어에 들이대고, 중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상상을 튜브에 채워 넣는 법을 가르쳤다.
발이 다시 페달을 밟는다. 어딘가에 닿고자 할 때는 움직여야 한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스스로 페달을 밟아야 한다. 그렇다고 꼭 어딘가 목적지를 두고 가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자전거는 목적지에 닿기 위한 교통수단 그 이상이다. 굳이 목적이라면 지상으로부터 십 센티미터와 삼십 센티미터 사이 공중에 발을 두는 것이다. 땅에서 발을 떼고 일상의 중력으로부터 아주 조금 탈출하는 것이다. 중력이 부르면 연착륙할 수 있는 높이에 몸을 두는 것이다.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시인 네루다를 만나러 가던 집배원 마리오처럼 이 자전거가 시와 은유와 열정과 사랑과 혁명으로 나를 데려다 줄지 모른다. 가방에 시인에게 오는 편지와 소포가 가득 차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발이 두어 뼘 지표면을 벗어났을 뿐인데 마음이 덩달아 중력을 거역한다.
무릎 위에 얹힌 큰 흉터는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얻었다. 뒤에서 잡아주는 사람은 언제인가 잡은 손을 놓는다는 것을 자전거에게서 배웠다. 어 어 하는 순간 당황했을까. 비틀거리던 자전거는 시멘트벽을 향해 나동그라졌고, 몸은 벽에 패대기쳐졌다. 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피부와 근육이 뭉개지며 뼈를 드러냈다. 나를 나동그라지게 한 것은 자전거를 놓은 손이 아니라 나의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흉터는 이따금 입을 열어 속삭인다. 겁 먹지 마. 다 마음의 일이야. 계속 페달을 밟아. 보이지 않는 큰 손이 잡고 있다고 믿어. 흉터가 아니라 생의 무늬야.
자전거를 타며 넘어지는 법을 배웠다. 넘어지는 방향으로 핸들을 꺾어야 덜 다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잘 넘어지는 법을 알게 되면서 일어서는 법을 알게 되었다. 멈출 때를 알아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언제라도 멈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간절히 달리고 싶은 욕망을 단호하게 자제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넘어질 때는 혼자라는 것도 알게 됐다. 일학년 여고생들을 이끌고 달려가던 담임 선생님은 자전거로는 닿을 수 없는 먼 곳으로 가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유방암이라고 했던가. 의자와 침대 귀퉁이에 제각기 앉아 밤을 보내고 석 달 후 이혼했다던가. 첫날밤 이야기로 우리를 울리던 그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 일요일의 자전거 하이킹에 함께하지 못한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마음이 이따금 내가 오를 수 없는 산악자전거 코스로 몰린다. 거칠고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손이 불가능한 코스로 생의 핸들을 꺾으며 몰아 부칠 때,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생각한다.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누비며 아름다운 도라의 사랑을 얻은 유대인 귀도는 어린 아들과 함께 아우슈비츠로 끌려간다. 꼭꼭 숨어라. 어린 아들에게 숨바꼭질 놀이를 제안한다. 인종살해의 광적인 비극의 현장에 가미된 유머는 삶을 계속하게 만든다.
인생은 아름답다. 역병이 몰고 온 우울의 핸들을 명랑의 방향으로 틀어야 할 때이다. 영화의 전당으로 핸들을 튼다. 삶은 초대장이 오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대신, 스스로 초대장을 발송하는 것이다. 자전거가 수영강의 반짝이는 윤슬 위를 달린다. 축제가 다 끝났으면 또 어떤가. 자신이 주인공인 영화, 리허설 없는 삶이 계속되고 있는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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