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초, 몸이 몹시 안 좋았다. 자꾸 침이 마르고 목에 큰 이물감이 느껴져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졌고, 급기야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가슴이 뛰면서 불안이 공포처럼 밀려들었다. 말로만 듣던 공황장애 증세가 내게 온 듯했다. 급한 마음에 몇 군데 병원을 돌아다녔지만 한결같이 별다른 이상 증세가 없다며 정 견디기 힘들면 신경안정제를 처방해주겠노라 했다. 그러던 중 마침 한의사인 처제에게 진맥을 받고 들은 말이 이 병은 마음에서 온 것이 크다며 마음을 편히 먹어야 나을 수 있다고 했다. 침을 맞고 한약도 병행해야 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적게 먹고, 적게 신경을 쓰고, 적게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날의 나의 모습은 쉼 없이 앞만 보며 달려온 생이었다. 직장인 학교생활을 하면서 또 시를 쓰고 문단활동을 하면서 게다가 주말엔 사회인야구까지 이틀이 멀다 하고 밤늦게 귀가하는 일이 잦았으니 그동안 나를 혹사한 결과가 아닌가 싶었다. 결국 몸이 내게 쉬라는 경고를 보낸 셈이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운동이 바로 걷기였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그리고 가까운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걷기는 나의 몸과 마음을 동시에 만나며 스스로 진단할 수 있는 소중한 접점으로서의 행위가 돼주었다. 또한 내가 발 딛고 숨 쉬고 있는 여기 이 자리에 대한 관심과 소통을 가능케 해준 매개가 되기도 했다.

우선 처음으로 걷기 시작한 곳은 갑갑한 아파트촌을 벗어나 자그마한 주택들이 마주한 아랫동네 골목길이었다. 이른 새벽 혹은 밤늦은 시각 보안등 불빛을 따라 걷노라면 집집마다 내어놓은 쓰레기봉투 사이로 부산하게 움직이는 길냥이들의 발자국과 함께 불현듯 유년시절의 추억들이 떠올랐다. 가난했지만 식구들의 온기가 느껴졌던 그때의 모습들이 늘 같은 시간 대문 앞을 빗질하는 아저씨와 그 건넛집의 칭얼대는 애 울음소리, 그리고 TV소리보다 더 크게 담벼락 너머로 늘어선 능소화로 오버랩 되면서 걷기에 한층 힘이 실렸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단단해져 가는 종아리 근육과 함께 차곡차곡 쌓여가는 마음의 여유로움이 몸의 불안과 병적 증세를 조금씩 내몰았다. 내친김에 집 앞산 등산로를 하나하나 걸으며 그 숲길들을 나만의 코스로 만들기 시작했다. 머리를 식혀주는 짧은 산책로에서부터 숨이 차오를 한두 시간짜리 산행길, 나아가 주말을 이용해 몇 개의 봉우리를 넘는 등산로까지, 혼자서 혹은 아내나 지인들과 함께한 이 다양한 길들은 이제 삶에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렇게 꾸준히 걷다 보니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며 생활의 활력이 생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더 의미 있는 것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평소 같으면 무심히 지나쳤을 담벼락의 서툰 낙서와 전봇대 아래에 핀 노란 민들레꽃, 그리고 집집마다 내놓은 그 집 식구들의 손때 묻은 폐가구들이 예사롭지 않게 말을 걸어왔고, 숲길을 걸을 때면 여기저기 핀 야생화와 바람 끝에 매달린 나뭇잎의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통해 계절을 읽어낼 수 있는 오감(五感)을 선물 받게 되었다. 이렇듯 자잘하고 사소한 일상의 편린들이 내 속으로 들어와 더욱 풍요로운 생의 결을 마련해 준 것이다.

리베카 솔닛은 그의 저서 ‘걷기의 인문학’에서 “보행(步行)은 일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과 뭔가를 해내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다. 그러기에 보행은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며, 여행인 동시에 목적지다”고 말했다. 빠름이 시대를 지배하는 주요한 키워드가 되고 그러기에 남들보다 앞서야 그것이 선(善)이 되는 세상에서 걷는다는 것은 지극히 이런 현실에 반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로지 목표를 정하고 그 성과를 만들어 내야하는 오늘날 우리들의 조급함 앞에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운동의 차원을 넘어 우리들 생의 구석 하나하나를 되밟으며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발견해내는 성찰의 여정이 아닐까 한다.

지금 힘들고 지쳐 누워있는 이들이 바로 신발 끈을 묶고 문밖으로 나서면, 자신과 세계를 진심으로 만나는 아름다운 경험을 이 걷기를 통해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바로 행동으로 옮겨보시길 권한다.

시인·부산 경원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