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4차 대유행’이 임박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병원 방역 상태를 점검하고 관계자 회의를 하느라 경황이 없었다. 회의 중에 직원이 들어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원장님, 지금 꼭 통화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환자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수화기를 들었다. 어떤 남자의 쟁쟁한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조 원장님 맞으시죠? 제가 얼마나 찾았는지 모릅니다.”

자기 부친 때문이란다. 86세인 부친이 20여 년 전 내가 근무하던 병원에서 심장 수술을 받았다며, “윤○○”이라고 이름을 밝혔지만 오래전 일이라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튼 수년 전부터 노인의 상태가 많이 나빠졌단다. 다니던 병원에서는 치환된 판막이 망가져 재수술이 필요하지만, 고령이라 시행할 수 없다고 했단다.

최근엔 가족도 못 알아보고 식사를 거의 못해 인근 병원에 입원해 있지만, 우리병원으로 옮기고 싶다고 했다. 이제 와서 내가 무슨 큰 도움을 줄 수 있겠나 싶었지만, 며칠 후 도착한 노인을 만났다. 하루전 코로나19 음성 판정을 받은 분이라, 마스크를 내리고 인사를 했더니, 대뜸 나를 알아보고 반가워한다. “조 원장 아닌가요? 오래 살다 보니, 이렇게 만나게 됐네!” 노인이 나를 알아보다니! 순간 많이 놀랐다. 사람을 통 몰라보던 분이 선생님을 금방 알아본다며 보호자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이 날듯 말듯 한 노인의 손을 잡고 나도 아는 체를 했다. “아이고 어르신 오랜만입니다. 잘 오셨어요.”

며칠 후 짙은 안개가 걷히듯 노인에 관한 기억이 차츰 선명해졌다. 그를 통해 아득한 추억 하나가 소환됐다. 나에게 특별한 인상을 남긴 사람이다. 내가 그 사람 이름을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20여 년 전 어느 여름날. 65세 남자의 심장 수술을 마무리하고, 회복실로 옮겼다. 곧 마취에서 깨어나면 인공호흡기를 제거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의식이 회복되지 않아 밤늦도록 인공호흡기를 떼지 못했다. 여러 번 그의 손을 잡고 흔들며 큰소리로 눈을 떠보라고 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몸에 자극을 주어도 꼼짝하지 않았다. 다음 날 출근 즉시 환자를 만났지만 마찬가지였다. 왜 이럴까, 아직도 마취가 덜 깼나, 뇌신경에 손상이라도 왔나?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 마취를 담당한 의사에게 급히 자문했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기다려보자고 했다. 다행히 그날 오후에 환자가 움직인다는 연락을 받고 즉시 병실로 달려갔더니, 그가 눈을 부릅뜨고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후유!”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얼마 후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니 그가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이 자꾸 날 불렀지요. 그런데 몸이 영 말을 안 들었어요. 말도 안 나왔어요.”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우리가 하는 소리를 다 들었다고요?” 마취과 의사는 가끔 있는 에피소드라고 했지만, 혼수상태라 여긴 환자의 의식이 명료했다는 사실이 나에겐 다소 충격적이었고 예사롭지 않은 정서를 남겼다.

그 후 마취가 덜 깬 환자의 손을 잡고, 큰 소리로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 씨, 수술이 잘됐으니 안심하세요!” 젊은 의사들에게도 충고했다. 의식이 없는 환자 곁에서 항상 말조심 하라고, 그가 당신들의 말을 다 듣고 있을지 모른다고. 대학병원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요양병원에 근무하는 요즘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한다. 혼수상태로 있는 환자 옆에서 힘을 내라고 크게 말한다. 지난날의 일화를 바탕으로, 이 사람도 내 말을 듣고 있을 거라 여긴다.

현대의학은 영상검사와 혈액검사 같은 과학적 근거에 입각한 ‘근거의학(根據醫學)’ 중심이다. 반면, 사람의 이야기에 주목해야 한다는 서사의학(敍事醫學)은 아직은 무시당하는 경향이 많다. 서사의학의 역사는 짧다. 2000년 미국 콜롬비아 대학교 리타 샤론 교수가 ‘콜롬비아 서사의학 프로그램’을 설립해 의과대학 교육 과정에 포함시키면서 비로소 빛을 보기 시작했다. 사실, 질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와 그를 도와주는 의사가 공존하는 병원은 그들의 서사가 가득한 곳이다. 환자가 어떤 질환으로 그 속의 자아(自我)가 자기 몸(身體)을 신뢰할 수 없을 때, 의사는 몸의 질환과 심리적 불안을 동시에 가라앉혀 환자가 아픈 자아 대신에 건강한 자아를 다시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서사적 훈련을 받은 의사는 환자의 몸과 자아 모두에게 힘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요양병원에서는 서사의학적 접근이 더욱 중요한 것 같다.

최근 윤 노인의 상태가 의외로 양호하다. 한동안 음식을 통 삼키지 못했지만, 이제 누가 수발을 들면 잘 받아먹는다. 잠도 푹 주무시고 숨도 편히 쉰다. 노인이 아픈 자아보다 건강할 때의 자아를 더 느끼는 것 같다. 게다가 회진 때마다 나를 알아보고 활짝 웃는다. 그가 “조 원장!” 하며, 나를 부를 때마다 나는 20년 전의 그 의사를 떠 올려 본다. 서사의학, 그 언저리에서 환자와 그 의사의 이야기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수필가·의사·온천사랑의요양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