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이 시작된 지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 21세기의 시작을 운운하는 것이 좀 뜬금없이 들릴 수 있다. 그렇지만 ‘긴 19세기’와 ‘짧은 20세기’라는 말도 있다. 18세기말인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으로부터 일찌감치 시작된 19세기가 1914년 사라예보의 총성과 더불어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던데 반해, 20세기는 겨우 그때 시작되어서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갑자기 끝나버렸다는 것이다. 확실히 역사적 시간은 물리적 시간과는 격차가 있다. 21세기는 21세기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을 수도, 어쩌면 여태껏 제대로 시작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전 지구적인 팬데믹 상황은 그 규모뿐만 아니라 진행방식과 효과에 있어서도 세계를 그 이전과 급격히 단절시켰다. 아무리 매일매일 변화하는 세계에 살지만 그래도 우리는 현재에 대한 대충의 감각은 공유해왔다. 모든 시대와 국면은 그럴듯하게 포장될 수 있었다. 19세기를 지배한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문명화 사명’부터 식민지 피지배자들의 ‘해방’, 냉전기의 ‘자유’ 또는 ‘근대화’, 탈냉전기의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에 이르기까지 어떻게든 변호하거나 최소한 설명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어떠한 지배적인 개념과 프레임도 없이 그냥 아수라장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다. 하여간 더 이상 20세기는 아니다.

얼마 전 미국 대통령 바이든의 위선적 행태가 아랍세계를 대변하는 알자지라 방송에 의해 폭로되었다. 전임자와는 달리 자애로운 인상의 대통령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지속적인 평온”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립서비스를 하면서도 뒤로는 이스라엘에 엄청난 액수의 무기판매를 승인했다는 것이다. 이 보도가 맞는다면 실로 트럼프와 바이든의 차이는 그저 태도의 차이일 뿐이다. 미국과 유럽에 대한 환상은 이미 깨어진 지 오래다. 하긴 중동이나 미얀마 소식에는 아예 귀를 막고 싶을 지경이며 이웃나라 중국이나 일본은 날이 갈수록 멀어지는 느낌이다. 대체 이러한 요지경의 세계를 어떻게 바라봐야할지 오리무중이다. 국제사회는 어차피 약육강식이라고 냉소해본들, 아니면 정반대로 철학자 칸트의 ’영구평화론‘같은 원대한 이상론을 펼쳐본들 공허하기만 하다. 물론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각자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부터 해보자며 의로운 결의를 다질 수 있겠으나 기껏해야 해맞이 다짐 이상의 의미는 없다.

평생 역사의 연구와 교육을 업으로 삼은 사람으로서 이러한 세상에 대해 별다른 통찰이나 실천적 방향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에 무기력해질 뿐이다. 역시 책상머리 공부는 수험생에게나 도움이 될 뿐이라는 자괴감마저 든다. 그래도 딱 한마디 거든다면, 현 상황은 20세기적인 틀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싶다. ‘선진국 진입’이나 ‘자유세계 수호’, ‘민주화 달성’ 등 낡은 발상으로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은커녕 파악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현재는 한 시대의 완전한 끝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저 20세기가 끝난 정도가 아니라 그간 ‘근·현대’로 개념화되어온 수 백년간 장기지속적 체제의 완전한 종결 말이다. 때마침 찾아온 팬데믹은 너무나 역사적이다.

앞길을 잃은 세계에서 대한민국은 홀로 20세기의 과제를 마저 완수하고 있는 듯 보인다. 아주 성실한 복학생처럼 말이다. 냉전 반공주의에 의해 가로막혀 오래도록 지체되었던 정의로운 민주공화국 건설은 경제성장이 그랬듯 단계를 뛰어넘으며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어왔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자리잡는 속도보다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속도가 훨씬 빠른 한, 우리 가슴 깊이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꼭 지키고 싶은 나라가 되기는 힘들다. 어쩌면 이 목표 자체가 허황된 것인지도 모른다. 공동체의 운명보다는 아파트 가격 상승에 내 삶의 미래가 달려있는 사회에서는 말이다.

20세기의 현란한 정치 구호들은 실은 역사적으로 프랑스 대혁명 이래의 ‘근·현대’에 제기된 모든 정치적 이상들을 극대화한 것이었고 현실의 흐름 속에서 이미 여러차례나 파산선고를 받았지만 여전히 물러나지 않고 ‘꼰대’를 부리고 있다. 하지만 어쩌랴. 작금의 모든 사태들이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를 급격히 와해시키고 있는 것을. 미국과 일본은 더 이상 ‘선진국’으로 보이지 않으며 유럽은 동화 속 관광지로만 보인다. 북한은 공산국가가 아니라 핵탄두를 깔고 앉은 김씨 왕조로 보이고 각자도생이 만연한 대한민국은 어느덧 부유한 지옥으로 보인다. 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 앞으로 무얼 기준으로 판단해야할까? 솔직히 미래가 두렵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부산교대 사회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