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작가로 지내는 도서관에서 8월에 어린이 글쓰기 수업을 한다. 신나게 수업을 준비했는데 계획한 내용을 전부 다 바꿔야 할 상황이다. 거리 두기 단계가 격상됐기 때문이다. 어린이랑 만나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어 개설한 수업인데. 섭섭하다.

7살 무렵 들어간 학원은 간판이 2개였다. ‘청○미술학원/소○주산암산속셈학원’. 간판이 두 개라고 하지만 막상 들어서면 가게-방-부엌 순서로 놓인, 세탁소 우리 집과 비슷한 구조의 작은 점포였다. 상담을 받으러 갔던 날, 글자는 모르지만 이름은 쓸 줄 안다고 썼는데 엄마가 왼손으로 연필 잡는 나를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첫 수업 날, 나는 몹시도 긴장했다. 비 오던 여름이라 축축한 발가락을 오므렸다 펴면서 공책에 적힌 ‘가방 가위 가수’를 열심히 썼다. ‘ㄱ’을 따라 쓰면서 머릿속에 무수한 빗금을 그었다. 수업이 끝날 시간에 선생님은 학원에 딸린 살림방으로 학생들을 불렀고 ‘그랜다이저’ 비디오를 틀었다. 옷장, 작은 좌식 책상, 책장, 텔레비전이 놓인 단칸방이 아늑해서 그제야 나는 긴장을 놓았다.

학원에는 첫째 선생님, 둘째 선생님, 셋째 선생님이 ‘살았’다. 셋째 선생님은 대학생이라 주로 첫째 선생님과 둘째 선생님이 학원을 운영했다. 자매 선생님의 그 좁은 방은 내 유년 시절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돌봄 교실이었다.

겨울이었다. 아침 일찍 학원에 갔는데 선생님들이 분주했다. 방 한가운데 커다란 블록과 책으로 여러 개의 기둥을 세웠다. 그리고 그 위로 두꺼운 나무 합판을 얹었다. 미리 준비한 의자 여러 개를 합판 모서리마다 놓자 대형 책상이 완성됐다. 저학년용 공부방이었다. 책상은 아침마다 세워지고 저녁이면 허물어졌다. 우리는 팔씨름 대회를 열고 비디오를 봤으며 그림을 그렸다.

여름에는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잠수대회를 개최했다. 날씨가 좋으면 근처 ‘정묘사’의 풀밭에서 수건돌리기를 했고 지금은 ‘부산시민공원’이 된 ‘하야리아부대’의 축제를 즐겼다.

어느 날 한쪽 벽에 게시판이 생겼다. 손으로 만든 노란 종이별이 저학년 아이들 이름 위로 붙었다. 매일 수업 태도에 따라 별을 받았는데 목표한 별 모양을 다 채운 학생에게 선물이 있다고 했다.

별을 다 채운 친구들과 함께 학원에 ‘초대’받았다. 방에는 책상이 세워졌다. 그 위로 과자와 과일이 놓였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다방식 커피’가 도착했다. 어린이가 마시면 머리 나빠진다고 해서, 어른이 마실 때 조르고 졸라 한 모금 맛본 게 커피의 전부이던 시절이다. 그런 커피를 1인 1잔이라니. 그것도 소꿉놀이 때나 상상하던 예쁜 커피잔에 담아서. 선생님은 외국에서는 이런 티타임을 갖는다고, 익숙하지 않겠지만 너희들과 이런 시간을 가져보고 싶었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학용품 선물도 받았던 것 같은데 커피 기억만 또렷하다. 아마 그날 그 어른들에게서 귀한 대접을 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초대한 귀한 손님을 좋은 대접으로 모신다는 마음 말이다. ‘커피2 설탕3 프림3’의 그 마음은 달달해서 마실수록 줄어드는 게 아까웠다.

이삼십 대의, 어쩌면 그 시절엔 ‘노처녀’라는 딱지를 달았을, 가부장적 사회 안에서 남자 없이 생계를 꾸리며 살아가기가 고단했을, 80년대의 그녀들은 어른이지만 아이들 눈에도 서툰 티가 났다. 자매끼리 한집에 살고 있으니 어린이들 앞에서 다투거나, 학원 운영 방식의 소박함을 보면 그랬다.

처음 멀리까지 간 수련회 장소인 ‘부곡하와이’에서는 준비한 현금이 부족해(신용카드가 없던 시절이다) 첫째 선생님이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며 고민하는 모습도 봤다. 고만고만한 형편의 아이들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주려던 그녀들을,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렸을 그녀들을 떠올리면 사랑스러워서 코끝이 찡하다.

가난한 집의 왼손잡이 어린이는 그런 선생님들이 좋았고 자연스럽게 장래희망을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어른이 되어 학원이나 방과후 수업을 하며 만나는 어린이들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릴 때마다 내 안의 첫째 선생님, 둘째 선생님이 함께 호명된다. 그러면 나는 그 시절의 어린이로 돌아가 수업했다. ‘그날의 티타임’에 받았던 귀한 마음을 흉내 내며.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