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의미는 다양하다. 사전에 나오는 일반적 의미는 ‘사람이나 동물이 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서 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그 차원을 넘어 집을 형이상학적 의미로 썼다. 그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예컨대, ‘인간’이란 언어는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이란 개념이 담긴 집이라는 얘기다. 그 연장선에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는 곧 내 세계(존재)의 한계”라고 했다.

시인 기형도에게 집은 실연의 쓰린 추억이 깃든 곳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중략)/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집’이란 제목의 시다. 뮤지컬 ‘광화문 연가’는 이 시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 극중 주인공은 죽기 직전 인연을 관장하는 신의 안내를 받아 빈집을 여행하며 젊은 날의 사랑을 추억한다. 그 추억 여행을 이끄는 타임머신이 이영훈이 작곡하고, 이문세가 불러 히트시킨 명곡들이다. 1960년생 동갑인 기형도와 이영훈에게 집은 비록 이루지 못한 사랑이 머무는 빈 공간이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기에 아름답다. ‘추억의 빈집’인 셈이다. 하지만 그건 그들이 활동했던 1980, 90년대의 정서일 뿐이다. 그들이 세상을 떠난 지 10~30여 년 지난 요즘, 빈집은 격세지감을 느낄 만큼 판이한 의미로 바뀌었다.

광화문 연가의 신은 이제 유령으로 전락했다. 청소년들이 담력 테스트나 공포 체험을 하기 위해 불러내는 ‘빈집의 유령’이다. 최근 경찰에 지은 지 50여 년 된 부산 영도의 한 노후 아파트에 청소년 4명이 들어가 비명을 지르고 유리창을 깨는 등 소동을 부린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총 240가구인 이 아파트에는 현재 6가구만 거주하고, 나머지는 비어 있다. 그러다 보니 2, 3년 전부터 청소년들의 공포 체험 ‘명소’로 소문이 났다. 2019년 기준으로 전국에 이런 빈집이 152만 채에 달하며, 광역시 중에는 부산(10만9600여 채)이 가장 많다.

부산의 빈집에는 장기불황으로 인한 인구 유출, 저출산 고령화의 가속화, 수도권 블랙홀의 심화 등 모든 폐해가 응축돼 있다. 황폐한 빈집에서 청소년들이 유령놀이를 한다. 더는 추억도, 낭만도 찾을 수 없다. 서정이 메마른 도심 빈집에는 생존경쟁에서 도태된 삭막한 서사만 유령처럼 떠돈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