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문화재단이 소유한 국내 최대의 사립미술관인 리움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옛 이건희 회장 자택 근처에 있다. 2004년 준공한 이 미술관은 1만5000여점에 달하는 소장품 규모도 그렇지만,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3명이 설계해 그 자체가 예술품이다. 정부가 지난주 ‘이건희 미술관’ 후보지로 지목한 장소 두 곳 가운데 용산가족공원은 리움과 같은 용산구에 있고, 종로구 송현동 역시 1시간이 채 안 되는 거리다. 경기도 용인에는 삼성가의 또다른 미술관인 호암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서울·경기권에 이미 수준급 삼성가 미술관이 두 곳이나 된다. 여기에 이건희 미술관을 국립으로 또 짓겠다는 게 지금 정부의 발상이다.

고 이건희 회장 유족이 문화재와 미술품 2만3000여점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고, “기증품을 전시할 특별관을 마련하라”는 대통령 지시가 떨어진 게 지난 4월이다. 이후 3개월간 정부는 미술관의 성격이나 부지 선정 기준에 대한 어떤 공청회나 설명회도 연 적이 없다. 문체부 내부에선 서울로 이미 결론을 내리고 지방은 그저 들러리를 세운 것이다. 황희 장관이 용산과 송현동 부지를 점찍으면서 내세운 이유는 더 가관이다. “서울에 있어야 중앙박물관과 현대미술관의 인력을 활용할 수 있고 접근성이 뛰어나 문화 향유의 기회가 늘어난다”는 발언 말이다. 별도의 문화시설이 생기면 필요한 전문인력은 새로 뽑는 게 정상이다. 전국이 2~3시간 생활권인 시대다. 비슷한 기관끼리 붙어있어야만 시너지가 난다는 주장은 20세기에나 통할 법하다. 국립현대미술관만 해도 서울관 덕수궁관 과천관 청주관으로 흩어져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문화 향유의 기회가 수도권 주민에게는 중요하고 지역민에겐 중요하지 않은가. 정치 경제에 이어 문화까지 중앙집권적 속내를 이제는 눈치도 안 보고 마음껏 내보인다.

이건희 컬렉션은 규모와 내용이 모두 방대하다. 한국의 고서 고지도 서화부터 동서양의 근현대 미술품까지 장르 시대 지역이 혼합돼 있다. 세계의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이 점점 세분화 전문화되어가는 추세에 역행해 이들을 한데 뭉쳐 통합하는 게 옳은지, 안 그래도 구멍이 많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컬렉션 수준을 이 참에 업그레이드부터 하는 게 나은지 미술계에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세계가 깜짝 놀랄 기증 앞에서 계획도 전략도 비전도 없는 정부가 초래한 대혼란이다.

이미 터를 잡아버린 공공기관이나 민간기업의 본사를 지방으로 옮기는 건 쉽지 않다. 1차 공공기관 이전은 시작부터 완료까지 무려 12년이나 걸렸다. 하지만 문화시설은 다르다. 부지매입 건축비 인건비를 모두 국가가 대는 신규 국립은 더욱 그렇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새 분관을 곧 지방에 짓는다. 서울 경복궁 내 국립민속박물관은 기존 시설임에도 ‘지역균형’ 차원에서 세종시로 보내려 한다. 중요한 건 접근성이 아니라 정책적 판단과 의지이다. ‘분권’이라는 말은 정치적 생색이 필요할 때 잠시 꺼냈다가 집어넣는 장식물이 아니다.

프랑스가 문화강국이라는 타이틀을 괜히 얻은 게 아니다. 프랑스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문화부라는 직제를 만든 나라다. 전후 드골 정부는 대문호 앙드레 말로를 초대 문화부 장관에 임명해 문화의 지방분권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프랑스 전역에 ‘문화의 집’을 세워 가능하면 많은 국민이 미술 음악 연극에 접근할 수 있게 했다. 프랑스 문화가 수도 파리 뿐이라면 오늘날 같은 정체성은 생길 수 없었다. 스페인의 쇠락한 지방 공업도시인 빌바오가 미국 뉴욕의 구겐하임을 유치해 문화관광과 경제부흥이라는 떡을 양손에 쥐게 된 사례를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서울의 국립시설은 박물관과 미술관을 합해 모두 16곳, 경기도까지 넓히면 22곳이다. 좀 있으면 국립한국문학관이 서울에,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인천에 각각 들어선다. 800만 명이 살고 있는 부산 울산 경남에는 국립미술관이 단 한 곳도 없다. 국립박물관만 부산에 두 곳, 경남에 세 곳 있을 뿐이다. 문화시설의 수도권 집중도는 대략 40%, 미술관은 50% 이상이다. 국립만 따지면 80%가 넘는다.

예술품을 보는 안목은 학습과 경험으로 길러진다. 하지만 그게 단계적이지 않다. 최고를 접하면 그 순간 안목도 최고가 된다. 문화 향유는 문명국가 국민 최고의 권리다. 비수도권 주민도 최고 수준의 인류 유산을 가까이에 두고 감상하고 싶다. 분권 기대가 역대 어느 정권보다 높았던 문재인 정부지만 공공기관 추가 이전은 가물가물하고 기업의 수도권 몰아주기는 계속된다. 그 와중에 서울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문화 사막화 역시 가속도가 붙고 있다.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