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석꾼은 1년 농사를 지어 천석의 쌀을 수확하는 부자, 만석꾼은 그 10배의 부자다. 1석은 쌀 144㎏, 1000석은 144t이다. 1000석을 거두려면 논 8만 평(26.6㏊)이 필요하다. 축구장 40개를 합한 토지가 있어야 천석꾼이 된다는 의미다. 절대 빈곤이 지배하던 1930년대, 천석꾼은 인구의 0.1% 미만이었다. 산업화 시대엔 ‘억대 부자’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러나 요즘 그 정도론 전셋집도 못 구한다. 부자 소리 들으려면 자산이 최소 50억 원은 돼야 한다. 서구 부자를 일컫는 용어가 백만장자(밀리어네어)에서 억만장자(빌리어네어)나 조만장자(트릴리어네어)로 바뀌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직원의 평균 연봉이 1억 원 이상인 대기업은 더 이상 희귀 사례가 아니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엔씨소프트 넷마블 네이버 카카오 등 최근 호황을 맞은 IT 게임 기업의 임금은 수직 상승 중이다. 택배 배달 등 과거엔 기피 대상이던 업종에서도 극소수지만 억대 수입을 올리는 사람이 나온다. 하지만 소득 인플레가 아무리 심하다 한들 억대 연봉은 여전히 많은 샐러리맨들의 선망 대상일 뿐이다.

요즘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재난지원금 2차 지급 기준에 대한 관심이 높다. 당정이 확정한 기준선은 소득 하위 80%이다. 2100만 가구의 소득을 일렬로 세웠을 때 상위 1~20등을 제외한 하위 21~100등까지 1인당 25만~30만 원씩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부부와 미성년 자녀 2명으로 구성된 4인 가족이라면 이 대열의 한가운데 위치한 중위 50%는 연소득이 약 5700만 원, 80%는 1억 원을 살짝 초과한다. 각자 연봉이 5000만 원인 맞벌이 가정 뿐 아니라 외벌이 가장의 연봉이 1억 원 이상이어도 지원금 지급 대상에 포함된다는 말이다.

‘20 대 80 사회’라는 표현이 등장한 건 1990년대 초반이다. 세계화 때문에 빈부 격차가 심해져 상위 20%가 부의 80%를 차지한다고 성토했다. 최근엔 이 비율이 ‘1 대 99’가 됐다. 자산이 상위 1%에 쏠리는 극단적 불평등을 상징한다. 나라의 소득이 높아졌다고 국민 개개인의 주머니가 골고루 두둑해지는 건 아니다. 이미 많이 버는 사람이 더 많이 벌어 평균을 높였을 뿐 통상 빈곤층의 소득 증가율은 부유층을 따라가지 못한다. 우리나라도 1억 원이 2억, 3억이 되면서 전체를 끌어올렸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억대 연봉자도 상위 20%가 아닌 하위 80%에 속할 만큼 소득이 상향 조정됐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함께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강필희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