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농정(農政)을 일으키고 농서(農書)를 한 곳에 모으려고 하는 것은 농부들이 가을 수확을 고대하는 것보다도 더 간절하다.” 세종과 함께 조선 최고 애민군주로 꼽히는 정조는 1798년 11월, 농정과 관련해 조언을 구하는 어명을 내렸다. 당시는 농사가 경제의 근본인 사회였으니, 국가 기간산업 개혁에 대한 아이디어를 공모한 셈이다. 이에 글을 올린 이가 27명, 농서를 지어 바친 이가 40명에 달했다. 글과 책을 묶어 펴낸 게 ‘응지진농서(應旨進農書)’다.

응지진농서의 주요 관심사는 농사 기술보다는 토지 소유에 쏠렸다. 지주가 멋대로 소작료를 정해 토지를 빌려주고 농사를 짓는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가 문제였다. 높은 소작료를 감당하지 못해 빈농으로 전락하는 소작인이 늘어나면서 민생과 국가경제가 갈수록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전라도 영광의 진사 이대규는 ‘균전론(均田論)’를 주장했다. 농민 한 가구당 토지를 100무(畝)씩 지급하고 조세와 부역을 균등하게 부과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토지를 국유화해야 하는데, 지주의 소유권에 배치되는 일이어서 불가능했다. 그 대안으로 나온 게 경상도 유학 이제화의 ‘대전론(貸田論)’. 국가 감독 아래 빈농에게 지주의 소작지를 균등 분배하고, 소작료도 일정 비율을 적용해 착취를 막는 것으로, 토지 소유권은 인정하는 방안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지주의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했다.

균전론과 대전론은 토지 국유와 사유라는 제도 시행의 전제는 다르지만, 농사 짓는 이가 토지를 가져야 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근본 취지는 같다. 당시 이밖에도 정약용의 ‘여전론(閭田論)’ 등 많은 토지 소유 개혁론이 제기됐지만 모두 제도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조선의 망국과 일제 식민지화의 최대 원인이다. 경자유전 원칙이 수용된 건 1948년 정부 수립 후 제정한 헌법과 농지개혁법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70여 년 지난 현재까지도 이 원칙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각종 불법과 편법을 동원한 부동산 투기가 기승을 부려서다. 경기남부경찰청이 지난 23일 농지법 위반 혐의로 수사 또는 내사하고 있다고 발표한 82개 ‘가짜 영농법인’이 단적인 예다. 이들은 농업경영계획서를 허위로 작성해 땅을 산 뒤 지분을 쪼개 파는 수법으로 수백억 원의 차익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토지에 관한 원칙은 동일하다. 농민이 토지를 가져야 하듯이, 주택 또한 실거주자가 소유해야 한다. 이 원칙이 무너지면 불로소득이 판치게 되고, 그 길은 망국으로 이어진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