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엔딩’ 노래가 잦아들 즈음 장흥에서, 탐진강 따라 자전거 여행을 가다 강변에 자전거를 세웠다. 벚꽃 진 나무 아래 접이식 의자를 펴고 앉았더니, 봄볕도 좋을 씨고! 장거리 달려오느라 지친 눈을 쓱쓱 비비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저 앞에 키가 2m쯤 되는 나무가 시방 연두색 잎들로 뽐내고 있잖은가.
‘흠, 저게 틀림없는 갯버들이겠다!’ 화창한 봄날에, 저 나무를 보고도 장난기와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으면 촌놈 출신이 아니지. 슬렁슬렁,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곧이어 갯버들 쪽으로 가 천천히 상태를 관찰했다. 물이 한창 올랐어! 자전거로 돌아가 배낭에서 맥가이버 칼을 꺼낸 나는, 갯버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오랜만에 옛날 솜씨 한번 발휘해봐?’ 어느 게 적당할까. 양손의 엄지와 검지로 갯버들 가지마다 굵기를 가늠해 보고선, 그중 곧은 가지의 중간 마디를 한 뼘쯤 잘라냈다. 철없던 어린 시절이었으면 가지 째 툭 꺾었겠지만 조심조심. 그리곤 갓 잘라낸 자국에서 나오는 수피(樹皮)의 풋풋한 내음을 맡으며 눈을 감았다. 미안한 마음과 아련한 추억에 싸여.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나. 먼저 껍질이 잘 벗겨지도록, 가지의 자른 부분을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런 다음 두 손을 각기 반대 방향으로, 빨래 짜듯 살살 비틀기 시작했다. ‘오, 금세 누글누글해졌는데.’ 껍질과 목질 부분이 따로 돌아가는 걸 확인하고선, 하얀 속살의 목질 가지를 쑥 뽑아냈다. 이야, 제대로다!
목질 가지를 버리고 다시금 수피 내음을 맡은 나는, 껍질의 양쪽 끝을 칼로 다듬었다. 그 뒤 입술이 닿는 부분은 겉껍질을 더 깎아서, 얇디얇게 만들었다. 종이 두께 정도로 얇아야, 입으로 불 때 떨림이 좋아 피리 소리를 더 잘 낼 수 있으므로. 삘~리~리~삑. 입으로 불어 소리를 시험해본 다음, 한 번 더 깎고 다듬고. 마지막으로 몸통에다 작은 구멍을 네 개 내었다. 피리랍시고 형식으로나마 오른손, 왼손의 검지와 중지로 네 구멍을 짚을 수 있게.
삑~삑, 삘~리~리~삑. 어떤 노래나, 심지어 음계와도 무관하게 맘내키는 대로, 서너 번을 불고 나자 만감이 교차했다. 어릴 적에 버들피리 만들어 불던 때의 정겨움이 서리는 반면, 한편으론 거의 반백 년이나 지나 버들피리를 만들어보는 세월 앞에 모든 게 흩어져간다는 느낌 때문에. 그간 살아온 내 삶도 갯버들 가지처럼 조금 더 부들부들했으면, 제멋에 겨운 버들피리 소리와 같이 내 나름의 풍미 있는 생음을 내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까지 더해져서.
버들피리를 만들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소나무나 편백나무처럼 수피 부분이 딱딱한 나뭇가지로는 피리를 만들기 어렵다. 만일 그런 가지로 피리를 만들려해도 속을 파낸 뒤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 때와 같이 ‘서(reed:갈대나 대나무를 얇게 깎아 만든 떨림판)’를 따로 삽입하지 않는 한, 껍질 그 자체로는 피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갯버들 가지고는, 그것도 물이 한창 오르는 4월의 버들가지로는 누구나 쉽게 피리를 만들 수 있다. 풀피리, 보리피리 역시 마찬가지지만, 이맘때 쯤의 버들가지는 껍질이 얇고 보드랍기 때문에 소리도 더 크고 맑게 나온다. 이를 인생에 비유하자면 한창 물 오를 때인 청년기에 좀 더 부드럽고 유연해야 했는데, 그땐 왜 그렇게 딱딱했고 꼬박꼬박 따지면서 살았는지 원.
갯버들이야 설혹 목질 부분이 딱딱하더라도 다음 해엔 가지에 새로이 물이 올라 보드라운 수피가 다시 생기니, 사람의 일생과 어떻게 단적으로 비유하랴만. 우리네 인생도 경험치는 쌓여 삶의 내면은 단단해지는 한편으로, 외면적으로는 좀 유들유들한 관계로 아름다운 삶을 살면 좋겠는데.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든 나 스스로가 매년, 아니면 고비 때마다 인생의 초록물을 새로이 들이며 살아야 하느니. 실은 갯버들도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새 삶의 물을 빨아올렸기 때문에 수피에 푸른 생명이 돌았고, 그로 인해 버들피리로 쉬 변신해지는 것 아닐쏜가.
앞으로의 생은 갯버들 가지만큼이나 유연하고 푸릇한 마음으로 살았으면 싶다. 그래야 내 삶에서도 버들피리 같은 변신의 가치가 나오지 않을까. 치기로 버들피리 만들다 문득 든 생각이 어떤 깨우침으로 이어질지는 모르겠다만.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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