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30년에 가깝도록 가을이 되면 학생들과 답사를 떠났다. 오래 다니다 보니, 학생들은 처음 가는 곳이지만, 세월의 때가 묵은 나로서는 7, 8회를 찾은 곳도 있다. 대학에 자리를 잡기 전부터 다닌 것을 합하면 10회를 훌쩍 넘긴 곳도 적지 않다. 이런 곳은 아무래도 감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도산서원의 경우가 그런 곳이다. 다만 한 곳을 제외하고는! 학생들이 서원을 둘러보는 동안 나는 혼자 도산서당(陶山書堂)의 암서헌(巖棲軒, 서당의 마루)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이상하게도 이곳만은 감흥이 식지 않았다.

도산서당에서 퇴계는 제자들을 길렀고,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정치가와 학자가 쏟아져 나왔다. 퇴계란 이름의 무게와 그의 제자들을 떠올리면 무슨 대단한 학교인 것 같지만, 도산서당은 겨우 3칸에 불과한 기와집이다. 작고 좁다! 하지만 도산서원 어디에도 이곳 서당보다 더 사랑스러운 곳은 없을 것이다. 앞은 좁은 마당인데, 마당 건너 낮은 담장이 있어 서당 안팎 공간을 분리했다. 하지만 담장 중간을 틔워 사람이 다니게 하였으니, 서당은 외부와 구분되면서도 트여 있다. 마당 왼쪽에는 네모난, 작은 연못이 있어 밋밋할 수도 있는 마당에 변화를 주었다. 전체적으로 안온하고 정갈하다. 서당의 건물과 공간은 퇴계가 설계한 것이다. 답사 때마다 나는 이 조촐한 건물에서 퇴계와 사족(士族)들의 절제된 삶을 떠올리곤 했다.

도산서원을 보고 나면 대개 하회마을로 간다. 하회는 너무 많이 바뀌었다. 자주 들르기도 했거니와 이제 완벽한 관광지가 되었기에 별다른 흥미가 없다. 가고 싶은 곳은 지척에 있는 병산서원이다. 병산서원은 이른바 ‘병호시비(屛虎是非)’로 이야깃거리가 많은 곳이지만, 답사자료집에 충분히 써 놓았기 때문에 나서서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병산서원은 병호시비 때문이 아니라 오직 만대루(晩對樓)를 보기 위해서 찾는 것이다. 병산서원의 정문이라 할 복례문(復禮門) 너머 양옆으로 날개를 활짝 펼친 건물이 만대루다. 만대루 앞에는 몸피를 줄인 낙동강이 흐르고 바로 그 뒤에 산이 옆으로 누워 강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곧 병산(屛山)이다. 만대루를 세장방형(細長方形)으로 설계한 사람은 틀림없이 낙동강을 앞에 두고 가로로 누운 병산과의 조화를 의식했을 것이다. 나는 만대루에 앉아 앞쪽의 낙동강과 병산을 바라보고 비로소 만대루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아니, 누구라도 만대루에 앉으면, 이 건축물이 세장방형이 된 이유와 자신이 그 조화로운 공간의 미에 참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풍수를 따지는 것에 질색을 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내가 풍수지리학에서 단 하나 믿는 것은 있다. 곧 ‘국(局)’이란 개념이다. ‘국’은 특정 장소가 그 주변의 형세와 어울려 만들어내는 ‘공간의 특성’ 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모든 공간은 나름의 특성을 갖고 있다. 인간이 짓는 건축물은 그 건축물이 들어설 공간과 당연히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곧 ‘국’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대루는 주변의 ‘국’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물이다. 사람들이 만대루에서 편안함과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해운대에서 25년을 살았다. 근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엘시티(LCT)도 늘 지나다니던 곳이다. 이따금 산책을 하기 위해 달맞이언덕을 거쳐 미포 쪽으로 내려갈 때면 이 101층의 하늘을 찌르는, 가파른 빌딩은 나에게 너무나도 불쾌하고, 불편하다. 그것은 정말 ‘국’에 맞지 않는 것이다. 이 초고층건물은 ‘참혹’ 그 자체다. 해운대의 경관은 ‘국’에 맞지 않는 콘크리트 덩어리로 참혹하게 파괴됐다. 한 마디로 망한 것이다. ‘국’에 어울리게 지어진 도산서당과 만대루의 배후에는 자기절제의 윤리가 있었다. LCT 배후에는 윤리라고 말할 것은 없다. 환경이야 파괴되든 말든,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오직 화폐를 향해 달려드는 소수 인간들의 탐욕만이 충만할 뿐이다. 그 탐욕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고 가파르다. 우리는 그 소수의 탐욕스런 인간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산다. 이 세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