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는 봄날의 우울, 춘수(春愁)를 어루만지는 향기를 가졌다. 나의 미나리는 멀고 높고 맑은 곳에서 온다. 하리 중리 상리 원상리. 마을의 이름은 장이 서는 면소재지 소읍에서 출발하여 높아지고 멀어진다. 마을이 높고 멀어질수록 물이 맑아진다.

1일과 6일, 오일장이 서는 봄날 어머니는 꼭두새벽부터 길목으로 나가 미나리를 기다린다. 해가 뜰 무렵 어머니가 기다리는 미나리 농부가 원상리에서 내려온다.

미나리 나박김치, 미나리전, 미나리생채, 미나리숙채, 미나리강회. 어머니는 미나리로 봄날 밥상에 초록을 채운다. 나는 겨우내 방전된 초록을 충전한다. 낙동강의 지류 병성천 먼 상류에 자리한 원상리 물이 깨끗하다고 어머니는 믿는다. 어머니 가신지 오래 된 지금까지 나도 믿는다. 삶의 시장에서 멀어질수록 높고 맑아지는 것이 시 일 지도 모른다. 시(詩)가 원상리 미나리 같기를. 그러자면 삶이 물 맑은 원상리여야 할 것을.

영화에서 ‘미나리’가 재발견되었다. 가깝고 낮은 자리에서 자라는 비근한 식물 미나리가 누리는 영광이 늦었지만 반갑다. 예술은 습관화되고 자동화 되어 무감각하게 스쳐 보내는 사물과 세계를 재발견하고 복원하며 재현한다. 너무 익숙해서 죽어버린 사물과 세계는 감각적으로 낯설게 묘사되어 예술 안으로 들어올 때, 새로운 생명을 얻고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다. 영화 ‘미나리’에서는 아메리칸 드림을 통해 흔해 빠져서 새로울 것 없다고 오해한 미나리가 재탄생한다. 이민이라는 탈주로를 타고 재영토화하는 과정을 그려 보이는 미나리는 이민자가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는 지난한 과정에서 희망의 객관적 상관물이 된다. 원더풀(wonderful) 미나리. 아카데미상 여러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영화와 무관하게 봄은 미나리가 가장 향기로운 계절이다.

삶이 때로 사전정보 하나 없이 밀입국한 불법체류 같을 때가 있다. 어느 땅에도 닿지 못하고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난바다를 떠도는 보트피플 같을 때가 있다.

아메리칸 드림도 코리안 드림도 아닌 지구 드림은 무엇일까. 지구라는 별에서 생은 무엇인지도 모르는 지구 드림을 좇다가 현실의 돌부리에 걸려 수도 없이 넘어지고 자빠지는 장애물 경주일까. 가장 허술한 탈주로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탈영토화할 알량한 수단도 없이 가파름과 메마름과 차가움을 견디는 날들이 있다. 삶의 절벽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긴 어둠의 겨울을 간신히 통과해도 허기지기는 마찬가지인 긴긴 봄날, 미나리는 춘궁기를 견디게 하는 물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점령한 길고 긴 음압의 한 해를 보내고 맞이한 봄날, 그 어느 때보다 더 심한 지구의 정신적 춘궁기를 가시게 할 미나리는 어디서 자라고 있을까.

기억 속 또 다른 미나리는 더러운 물을 정화시키는 수생식물이다. 지금은 깨끗한 물에서 미나리를 재배하지만, 과거에 미나리는 대체로 흐린 물에서 길렀다. 인가 근처 생활하수가 흘러나오는 미나리꽝에는 벼를 재배할 수 없어 돗자리를 짜는 왕골과 미나리가 주로 재배되었다. 오죽하면 논이 아니라 ‘꽝’일까. ‘꽝 다음 기회를’. 미나리꽝을 지나며 정화된 물이 벼논으로 흘러간다. 사실 물 맑은 원상리 미나리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미나리꽝 미나리 일지 모른다. 일상의 하수에 몸 담그고 물을 정화시키니까. 시 역시 삶의 희로애락의 하수를 받아 정화시킨다. 시가 미나리처럼 세상의 흐린 물을 정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 나이브한 희망일까. 비린 삶에 더 깊이 뿌리 내려야 하겠지.

아주 다른 먹방영화가 되겠지만, 내가 영화를 만든다면 미나리 요리에 몇 컷 카메라 앵글을 맞출 것 같다. 미나리줄기전 마름모썰기 해서 깔고, 육전 생선전 지져 넣고, 황백 지단 은행 밤 호두 잣 고명 얹어 신선로를 끓일 지도 모른다. 아귀, 복어, 오징어 요리의 단짝이 미나리다. 미나리 나박김치 익었어. 미나리 듬뿍 넣고 아귀찜 할게,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와. 오징어강회 말고, 미나리나물 조물조물 무쳐 둘게….

언제나 두려움 없이 다시 집밥을 나눌 수 있을까. 삶의 차가운 비린내를 가시게 하고, 우울의 치명적 독성을 가시게 할 끈질긴 생의 징표, 미나리를 영접해야 할 때가 왔으니. 4월에는 한껏 맹독 오른 ‘복국 번개’라도 쳐야할까. 긴 음압의 들판에 다시 파랗게 봄이 왔으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