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대한 ‘저신뢰 사회’라는 비판도 과학에서만큼은 예외인 듯하다. 두 가지 기준에서 보면 그렇다. 첫째로 전문가 집단인 과학자들에 대한 신뢰다. 코로나19의 혼란 속에서도 국민은 과학자들의 발언을 대체로 귀담아들었다. 바이러스의 실체와 전파 메커니즘에 대한 논의가 보통 이상의 과학 지식을 요구함에도 그랬다. 둘째로 과학기술 투자에 대한 국민적 지지다. 한국은 세계에서 GDP 대비 R&D 투자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다. 올해 정부 R&D 예산은 27.4조 원으로 5년 새 8.3조 원이 늘었다. 그런데도 국민은 세금 낭비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과학기술 투자가 범국민적 동의를 얻은 셈이다.

과학에 대한 지지는 경제적 기대감에서 출발한다. 과학이 경제 발전과 국익의 밑거름임을 경험적으로 안다. 1966년 KIST 설립과 함께 시작된 한국의 과학기술사는 ‘한강의 기적’으로 표현되는 성장의 역사와 일치한다. 하지만 이는 착시 효과에 가깝다. 성장을 견인한 것은 과학‘기술’이지 ‘과학’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과학과 기술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산업을 일으켜 필요한 제품을 빠르게 생산해내는 것이 국가 과제였다. 추격형 R&D라 부르는 이런 패러다임은 과학‘기술’의 성과였다. 반면, ‘과학’의 성과는 단기간에 확인되지 않는다. 과학적 지식은 ‘조금씩’ 인류의 삶 속에 스며들어, 역사 단위의 축적 시간이 지난 후에 문명의 수준을 높이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또한, 과학적 발견과 활용은 정밀한 인과 관계가 아니라 우연과 불확실성에 의존한다.

노벨과학상의 수상 이력을 들여다보면 현대 인류 문명의 흥미로운 변화를 엿볼 수 있다. 1918년의 노벨화학상을 받은 하버는 공기 중의 질소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훗날 질소 비료 생산의 핵심 기술이 되어, 인류가 직면한 기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했다. 인공질소비료가 공급되자, 3년 만에 식량 생산량이 인구 증가량의 2배를 기록했고, 20세기 초 약 16억 명이던 세계 인구가 100년도 안 돼 70억 명까지 급증했다. 농업의 표준과 인류 복지를 향상하는 데 매우 중요한 수단을 만들어낸 연구가 된 것이다. 1901년 최초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뢴트겐이 음극선관 실험에서 ‘우연히’ 발견한 X선은 훗날 핵물리학의 태동과 의과학의 획기적 발전을 이끌었다. 물리학, 화학, 생의학 분야를 넘나들며 20명이 넘는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194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플레밍의 페니실린 발견 과정은 널리 알려진 대로 ‘실수’였지만, 감염 질환으로부터 수많은 생명을 지켜냈다. 2014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아카사키, 아마노, 나카무라는 청색 LED를 개발해 ‘횃불-백열전구-형광등’으로 이어져 온 빛의 혁명을 완성했다. LED는 효율과 친환경적 관점에서 기존 빛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적색과 녹색이 개발된 후 마지막 난제로 남아있었던 청색 LED 개발에는 세 과학자의 무서운 집념이 있었다. 아카사키와 아마노는 20년간 실험을 반복했으며, 나카무라도 사적인 약속을 일절 잡지 않고 하루 100차례씩 실험한 것으로 유명하다. 요즘 유행하는 ‘축적의 시간’의 결과인 셈이다. 청색 LED 완성으로 높은 효율로 밝은 빛을 내는 백색 LED가 가능해져, 개도국의 전등 보급률이 높아질 수 있었다. 노벨위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빛의 혜택을 선물해준 점을 높이 샀다.

과학은 지식의 지평을 넓힌다는 그 자체에 의미와 목적이 있다. 그래서 과학을 낭만적인 학문이라고도 한다. 발견한 지식이 후일 혁신적 기술과 제품의 기반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목적인 경우는 흔치 않다. 앞서 예로 든 연구들은 역사의 진보를 이끌고 인류 삶의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오히려 이 연구들이 예외적이지, 인류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연구들이 훨씬 많다. 그래도 과학에 대한 지원은 계속돼야 한다. 지금은 대체 이런 연구가 왜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어도, 훗날 인류의 명운을 뒤바꾸는 혁신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본래 과학이란 그런 것이다.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부산대 생명과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