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달라지지 않아. 오히려 자기 식대로 이용만 해 먹고 있잖아. 먹고 싸고 차지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어. 실패한 생물이야. 이대로라면 지구는 백 년도 버티지 못해. 솔직히, 이 행성에서 가장 해로운 생명체가 인간이야. 투자한 물과 햇볕이 아까울 지경이라고. 빨리 할당량이나 채우고 이 쓰레기 같은 행성을 뜨자고. 어차피 멸망할 행성 따위야 회사에서 뽑아먹을 만큼 뽑아먹은 다음에 알아서 처리하겠지. (임성용, ‘기록자들’, 76쪽)

임성용의 소설 ‘공원 조 씨’에서 지구를 만든 조물주, ‘알파’와 ‘오메가’는 지구의 인간을 실패작으로 규정한다. 인간으로서 참 야속하지만 요즘 지구가 굴러가는 모양새를 보면 인간이 세상 제일 해롭다는 데 공감한다. 어제만 해도 ‘조류독감 예방적 살처분’이라는 명목 아래, 굴착기가 살아있는 닭 떼를 무참하게 짓이기는 영상을 보고야 말았으니.

인간은 왜 해로운가. 코로나로 일상이 많이 흔들린 요즘은 ‘인간은 왜’를 절절하게 생각한다. 해로워도 우리는 서로가 그립다. 만날 수 없는 친구들과 단체 채팅방에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에는 늘 악당이 존재하고, 악당에 대한 뒷말은 필수다. 오늘 문득 깨달았는데 우리는 즐겁고 즐겁게 함께 욕하는 사이였다. ‘당근’ 거래하다 만난 무례한 사람을 욕하고, 끊임없는 시비로 주변 사람 괴롭히는 놈을 욕했다. 우리는 오직 글자로, 기상천외한 표현으로, 해로운 인간들을 저주했다. 그들의 해로움이 세상에 퍼지지 않아야 한다는 이유로 합심했다. 지구를 지켜낼 기세였다. ‘겨울날 실로폰 채로 이빨 하나하나를 쳐줄까 보다.’, ‘방금 A가 말한 욕은 리을(ㄹ)이 적절하게 들어가서 혀가 굴러가는 발음이 엄청나게 치욕적이다.’ 우리는 반성하고, 욕을 하고, 분석했고 그러면서 동시에, 맑아졌다.

고3 때였다. 내 방과 벽을 사이에 둔 옆집 방에는 밤마다 노름판이 벌어졌다. IMF 이후 빚더미를 안고 위장 이혼한 사내가 옆집 철물점을 얻었는데 운영은 하지 않았다. 건전한 취미를 모르는 동네 아저씨들은 그 집 방에 모여들었다. 누가 신고할까 봐 쉬쉬하던 도박판이라도 술을 마시면 시끄러워진다. 중얼거리던 말이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로 바뀌다가 티격태격 시비가 붙다 보면 새벽쯤 고성이 터지고 싸움이 벌어진다. 나는 시끄러워서 잠을 설칠 때마다 벽을 쳤다. 손바닥으로 벽을 때리며 어른에 대한 증오와 존경심을 납작하게 누르면 벽 저편은 잠시 조용해졌다. 물론 그것도 그때뿐이었다. 어느 날 너무 화가 나서 벽을 때리다가 큰소리로 외쳤다. “평생 그따위로만 살다 죽어라!” 순간, 엄청난 희열감을 느꼈다. 그 해로운 어른들은 그곳에 앉은 채 그대로 늙어 죽어버렸다. 실제와 상관없이 내 머릿속에서 말이다. 그 희열감은 내게 더 나은 어른을 상상하게 했다.

사람이 욕을 먹는 이유는 고통에 대한 상상력이 없어서다. 이웃을 상상하지 못하면 인간은 ‘먹고 싸고 차지하는 것’밖에 모르므로 해로워진다. 모두가 해로운 이 와중에 이 해로움을 들여다보고 상상하고 욕하는 인간도 있다. 나쁨을 정의하고, 욕을 세심하게 다듬는 우리처럼. 욕쟁이가 있는 한, 조물주가 지구를 버리고 가더라도 지구는 쉽게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인사발령 때문에 해외에 나간 남편을 둔 친구는 남편을 먼저 보내고 한국의 일들을 정리한 다음 아들과 일주일 전에 출국했다. 그녀는 지금 호텔에서 자가격리 중이다. 채팅방에 도착 소식을 알린 친구는 놀랍게도 출국 3시간 전에 처음 만난, 남자 청소년과 함께 지낸다고 했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출국하는 청소년이 2주 동안 혼자 격리될 것을 ‘상상’한 친구가 불편함을 무릅쓰고 함께 지내자고 한 것이다. 좁은 숙소에서 청소하고 밥 챙기고 빨래를 하는 친구를 응원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을 욕하며 더 나은 세계를 상상했다. 조물주도 버린 마당에 우리라도 우리를 주워야 하지 않겠냐는 마음으로 말이다.

이정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