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 머리가 좋아지는 첫 번째 이유는 산소섭취량이 증가하고 혈액순환이 좋아져 산소가 뇌에 골고루 퍼지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더 직접적이다. 손 발 눈 귀 등 우리의 신체는 외부 정보를 받아들여 뇌에 전해주고, 뇌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뇌의 출장기관이다. (…) 손과 발을 움직이면 뇌를 사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본인 의사 나가오 가즈히로 씨가 ‘병의 90%는 걷기만 해도 낫는다’에서 주장한 걸으면 머리가 좋아지는 두 가지 이유다.
걷기가 건강에 좋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걸으면 머리까지 좋아진다니 새해를 맞아 사람들이 들로 산으로 나서나 보다.
걷다 보면 구부정하던 몸이 바로 펴지고 기분도 상쾌해진다.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 분비가 늘어나는 덕분이다. 아무리 좋은 약이나 음식보다 걷기가 한 수 위임은 ‘약보(藥補)보다 식보(食補)가 낫고, 식보보다 행보(行補)가 낫다’는 ‘동의보감’ 가르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집 근처 학교나 공원에서 조금씩 목적지를 넓히며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엉클어진 생각의 갈피가 정리되는 걸 느낀다. ‘느림의 미학’이라 해도 좋고,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는 어느 철학자의 독백을 곱씹어도 좋다. 걸을 때 명상에 잠기고, 마음이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고 했으니 하는 말이다.
큰맘 먹고 산길을 따라 정상에 올라서면 시야가 탁 트이는 희열감을 덤으로 얻는다. ‘부산이 이렇게 생겼구나’ 하는 걸 새삼 확인한다. 등산로 입구마다 붙은 안내판과 갈림길마다 설치한 이정표를 볼 수 있다. 지자체가 경쟁적으로 둘레길을 다듬고 등산로를 정비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걸 과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아질 때 생긴다. 지난 2일 영도 봉래산을 오를 때 이야기다. 복천사를 기점으로 둘레길을 걷다가 자봉(387ｍ)을 거쳐 정상(395ｍ)에 도착했다. 정상을 이루는 바위까지 온통 덱 설치 작업이 진행중이었다. 무장애 덱로드를 만들어 도심과 해안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봉래산의 장점을 극대화하겠다는 취지란다. 적어도 그날 정상에서 만난 사람 10명 중 9명은 지나치다고 입을 모았다.
공사 주체인 영도구청 입장에선 많은 사람이 더 편하게 정상까지 접근하도록 돕는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으로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라면 다른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뒤끝이 개운찮았다. 다음주 황령산을 찾아 멀리 봉래산을 보며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과유불급’을 떠올렸다.
경성대 캠퍼스를 거쳐 갈미봉~사자봉~봉수대 코스를 밟았다. 사자봉 초입과 봉수대 주변엔 덱로드와 덱 전망대가 있다. 같은 인공 구조물이지만 봉래산 정상에서처럼 큰 거부감은 없었다.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봉래산 정상 덱 공사가 영도 주민의 안위를 지켜준다는 영도할매 전설까지 훼손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생각이 미치자 아쉬움이 더했다. 비단 봉래산 뿐만 아니라 부산 곳곳에서 덱 공사가 벌어지는 게 현실이다.
라스트 마일(last mile)은 독방에서 사형 집행 장소까지 죄수가 걸어가는 거리라는 의미이나 요즘은 다른 뜻으로 쓰인다. ‘라스트 마일 정책’이 대표적이다. 걷기엔 멀지만, 버스나 전철로 연결이 안 되며 택시나 자기 차를 이용하기엔 마땅치 않은 애매한 거리, ‘목적지까지 남은 1마일(약 1.6km)’을 빠르고 편안하게 해결하자는 취지다. 이를 위한 이동수단인 ‘라스트 마일 모빌리티’로 공유 전동퀵보드나 전기자전거 등이 있다. 또 ‘라스트 마일 딜리버리’는 유통업체의 상품이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전 과정을 뜻하며, 유통업체들이 서비스 차별화를 위해 배송 품질에 주안점을 두며 생겨난 말이라고 한다.
같은 단어이나 원뜻은 죽으러 가는 길이고 변한 의미는 삶을 더 편리하게 하는 길이다. 특히 삶을 편리하게 하는 일엔 그 대상자가 느끼는 감성이 중요하다. 산 정상까지 편하게 접근하려는 세태에 맞춰 이를 돕는 일과 인공 구조물로 둘러싸인 산 정상에서 느끼는 감정은 다른 문제다. 봉래산 정상을 찾는 많은 시민이 과연 덱로드에 만족할까, 영도할매 전설을 품은 바위에 박힌 쇠말뚝을 보며 오히려 마음을 상하지는 않을까, 그걸 어느 정도 고려하고 공사를 했을까. 행정이 고려해야 할 부분이 이렇게 디테일 해야 한다. “금정구 윤산에서도, 동래구 동래읍성 북장대에서도 덱 공사를 하는 걸 봤는데….” 봉래산 정상에서 이렇게 말하며 혀를 끌끌 차는 시민의 발걸음이 무거워보였다.
느린 걸음이 잰 걸음이라고 했다. 천천히 정확하고 끈기 있게 해야 하고, 그래야 성과가 크다. 그 수고로움이 자연과 동화되는 과정이라면 걷기 편하게 여러 시설을 하고, 그것이 자연과 조화를 이뤄야 마땅하다. 봄이면 더 많은 사람이 걷기에 나선다. 이들이 편한 길은 무엇일까.
수석논설위원 jsdo@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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