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짐작으로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미래는 그리움일 수 있다. 택배는 우리 시대의 반가움이다. 포장 상자는 때가 묻고 찌그러져 있었다. 칼날을 빼죽이 내어 테이프를 갈랐다. 7권의 책이 올망졸망했다. 재판14쇄 발행일 1989년 3월 10일. 이병주 작가의 ‘지리산’이었다.

소설로 들어간 후 이상한 일들이 연속으로 발생했다. 이상한 일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일들을 미루었다. 오늘 할 일을 내일 했다. 책상에 앉기를 서둘렀다. 생활의 잡다한 루틴, 가령 뉴스보기와 검색 등을 생략했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다. 주말에도 일을 핑계로 사무실에 나갔다. 버스보다는 지하철을 타게 되었다. 지하철의 진동과 소음은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유튜브에 붙잡히지 않았다. 약속이 즐거웠다. 약속장소로 출발하기 전의 1~2 시간은 최고의 집중력이 발휘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공눈물의 소비가 많아졌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시간을 잊게”(‘지리산’ 5권 267p)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병주 작가는 1921년에 태어나 1992년 사망했다. 그가 산 시대는 통째로 야만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일제시대와 해방, 좌우 대립, 이승만 독재, 한국전쟁, 4·19혁명, 5·16쿠데타, 박정희 독재, 광주민주화운동, 전두환 독재, 6월 민주항쟁 등의 사건이 있었고, 세계적으로는 대공황과 스페인내전,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냉전, 소련 붕괴 등의 사건이 있었다. 그 야만의 시대가 천재적인 소설가와 만나 방대한 이야기로 남았다. 지리산 1권의 작품해설에 해당하는 글 속에 이런 표현이 있다. “國家不幸詩人幸(국가불행시인행)이란 옛 중국의 시에도 있듯 이러한 불행한 시대의 넓고 깊은 체험이 작품을 위해서는 오히려 다행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병주 작가의 삶에는 여러 삶이 있다. 그의 삶은 화려하다.

그는 이념의 시대에 이념이 아니라 삶을 이야기했다. “역사의 그물로써 파악하지 못한 민족의 슬픔을 의미로 모색하는 방향으로 슬퍼해 보는 데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월간 ‘세대’ 지에 ‘지리산’ 연재를 시작하면서 쓴 글) 이념의 도구가 된 허망한 삶과 이념으로 포장한 사람들의 도구가 되는 가련한 삶을 “기록자이자 문학인 것을 혹은 문학이자 기록”으로써 썼다. 그는 시대를 앞서 있었다. 그것이 지금 우리 시대와 호응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와 우리의 시간을 이야기해야 한다. 고립의 시간이다. 정확하게는 고립을 각자 견디는 시간이다. 심심해서 괴롭다. 못 만나서 그립다. 놀지 못해서 불만이다. 혹시나 해서 두렵다. 불안하다. 그리고 우울하다. 시간을 정면으로 맞고 있는 셈이다. 시간에도 소유 관계가 있다. 자기 시간일 때는 덜 힘들고 덜 고단하고 불만이 쌓이지 않는다. 그러나 타인의 시간일 때는 고달프고 불만스럽고 견디기가 힘들다. 약속 시간이 지난 후 문을 응시하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이 어찌 짜증이 아닐 수 있는가. 그러나 시선을 해야 할 일 혹은 읽던 책으로 돌리면 그 시간은 괜찮은 것이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창조의 시간이 되기도 있다. 시간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우회’의 기술 혹은 지혜.

‘우회하기’는 때론 거대한 사건과 만나기도 한다. 대항해시대의 개막은 오스만제국의 지중해 무역 장악으로 인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우회하기였다. BTS도 우회한 결과 상상에도 없던 길을 만들어냈다. ‘데카메론’도 우회하기였다.

고립의 시간, 이병주 읽기는 의미와 가치를 모두 가진 우회하기다. 이병주 소설은 잘 읽힌다.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진입장벽도 낮다. 회의가 들지 않는다. 이야기성이 강하고 잘 짜여 있다. 묘사와 흐름과 통찰이 절묘하다. 무엇보다도 재밌다. 마침 2021년은 이병주 작가의 탄생 100주년이다. 꽤 오랜 시간 이병주를 읽을 것 같은 짐작이다. 시대를 앞선 작가, 이념이 아니라 “역사의 그물로써 파악하지 못한” 삶을 그린 작가. 각자 견뎌야 하는 시간 이병주 읽기의 고독과 그리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떨는지. 좋은 사건을 여럿 만들고, 좋은 사건들에 몸을 맡기는 근사한 2021년이 되시길.

동명대 겸임교수·도서출판 함향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