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상반기 극장가의 이슈는 한동안 ‘알라딘’이었다. 윌 스미스가 램프의 요정 지니로 출연한 실사 영화로, 5월 개봉 당시엔 큰 기대가 없었으나 OST 등이 입소문을 타면서 1위로 역주행한 것이다.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 4’도 탄탄한 구성과 진화된 캐릭터에 힘입어 한때 ‘알라딘’과 경쟁했다. 그러나 8일 현재 박스오피스 정상은 ‘스파이더맨 : 파 프럼 홈’이 차지하고 있다. 한여름 국내 극장가에서 1~3위 다툼을 벌이며 우리 영화 ‘기생충’을 멀찌감치 밀어낸 이들 영화는 모두 디즈니 또는 디즈니 자회사의 작품이란 공통점이 있다.

월트 디즈니(1901~1966)는 엄한 아버지에게 학대에 가까운 훈육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디즈니 만화에 부모가 모두 등장하는 작품이 거의 없는 이유를 여기서 찾는 이도 있다. 도널드 덕으로 유명한 만화가 칼 바크스는 수백권의 만화를 그렸지만 디즈니의 반대로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대부분이 여성인 작화 조수들은 박봉에 혹사를 당했고 노조 설립을 시도하다 해고되기도 했다. 그런 성향 탓인지 디즈니 만화 속 여성 캐릭터는 늘 소극적이고 인종주의 편견이 녹아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디즈니 만화가 달라진 것은 1990년대 들어서다. 성 역할이나 인종 문화적 배경에 변화구를 구사한 것이다. 1991년 개봉한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의 주인공 아리엘은 왕자를 기다리지 않고 사랑을 찾아 고군분투하는 캐릭터다. ‘토이스토리 4’에 나오는 양치기 소녀 보핍은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망토를 걸쳤다. 인디언 추장의 딸인 포카혼타스, 아버지 대신 전장에 나가 적을 물리치는 중국인 여전사 뮬란도 모두 그 연장선에 있다.

오는 2020년 개봉 예정인 실사판 ‘인어공주’의 아리엘 역에 핼리 베일리라는 흑인 배우 겸 가수가 캐스팅됐다고 한다. 붉은 머리와 하얀 피부가 특징이던 인어공주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것이다. 1970년대 미키 마우스와 도널드 덕이 남미 만화시장을 휩쓸 무렵, 도르프만과 마텔라르라는 두 학자는 “디즈니는 단순히 만화가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정신적으로 미국에 종속시키는 문화제국주의 산물”이라고 역설한 적이 있다. 변화된 시대적 상황을 작품에 담으려는 디즈니의 시도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지구 구원의 사명을 띤 어벤져스가 셀카 찍고 칼퇴하는 신세대 스파이더맨으로, 백인 공주가 유색 인종으로 바뀐 것을 두고 디즈니 제국의 야심이 더 교묘해졌다는 시각도 있다.

강필희 논설위원 flut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