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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54> 신기관-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

우상·미신 폭풍 뚫고…근대과학으로 나아간 ‘귀납법’의 위대한 항해

  • 서부국 서평가
  •  |   입력 : 2022-12-01 19:28:35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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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험 금기시한 중세학자에 반기
- 관찰과 본성규명의 중요성 역설
-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도 비난
- 가설→ 검증→ 결론 사례도 실어

- 원저 표지 근대 향하는 배 표현
- 과학 탄압받던 시절 진보 외쳐
- 새 시대로의 징검다리 역할 노력

- 학문으로 수익 좇는 시선 경계
- 현 디지털사회 방향에 질문 던져

17세기 영국에 왼손엔 자연과학이라는 방패를, 오른손으론 귀납법이란 날 선 장검을 움켜쥔 투사가 나타났다. 칼 손잡이에 LV라고 새긴 이름 머리글자가 보인다. 일명 베룰럼 경(Lord Velulam), 프랜시스 베이컨이다. 그는 이름만 요란한 기존 학설들을 방패로 밀어내고, 우상·미신·예단을 장검으로 쳐내면서 항구로 향한다. 그곳엔 아무도 간 적 없는 대양으로 떠날 범선이 그를 기다리는 중이다.
유럽에서 근대 과학으로 들어가는 문은 귀족 계층 같은 상류층에 국한돼 열렸다. 영국 화가 조지프 라이트의 ‘공기 펌프 속의 새의 실험’(1768년)은 일반인이 과학에서 느끼는 경외를 잘 보여준다.
이 고전을 몇 쪽 넘기면 머릿속에 그려지는 풍경이다. 저자는 엘리자베스 시대를 울렸던 정치가이자 철학자. 이 책 속에선 ‘과학 전사’다. 그는 그저 머리만으로 사물 원리를 밝혀온 학문을 쓸모없다며 밀어냈다.

경험주의자였던 그는 학문은 인류 복지를 증진해야 한다고 믿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베이컨이 틈만 나면 비판한 이유. “인간이 지금까지 사용해온 모든 개념은 오류이며, 사물로부터 부적절하게 도출된 것이다.” (1권 16장) 그는 앞선 14장에서 “그러므로 참된 귀납법(歸納法, induction)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고 썼다. 사변에 머물지 않고 사물을 관찰하고 실험해 본질을 찾아내는 게 귀납법. 근대 과학 방법론이 여기서 싹 텄다. 이전 학자들은 사물·자연을 실험하면 그 본성을 교란한다며 실험을 꺼렸다. 베이컨은 역발상으로 맞섰다.

“사람의 감정 본심 능력은 평소보다 교란됐을 때 더 잘 드러난다. 자연도 그대로 둘 때보다 조작을 가했을 때 그 정체를 더 잘 내보인다.”(1권 98장) 귀납법을 정당화하는 논리. 저자는 지금까지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이 새 논리학을 자신이 찾아냈다며 자신감을 내뿜었다.

‘신기관’(1620년) 표지에 그게 드러난다. 라틴어판 책 이름이 ‘노붐 오르가눔 스키엔티아룸(Novum Organum Scientiarum)’. 번역하면 ‘과학의 새로운 기관’. 오르가눔은 오르간(organ), 기관(機關)·기계장치를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여러 논리학이 일명 오르가논. ‘신기관’은 단어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비판이다.

표지 그림은 독자에게 많은 얘기를 건넨다. 그리스신화 속 헤라클레스 과업 얘기를 빌렸다. 범선이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가는 그림이 그렇다. 양쪽에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섰다. 헤라클레스는 열 번째 가업으로 삼두 괴물 게리온이 소유한 황소 떼를 훔치려 목적지로 간다. 거대한 산이 갈 길을 막자 두 쪽을 내버렸다.

‘신기관’ 원저 표지. 귀납법을 발견해 세상에 도움을 주겠다는 베이컨의 자신감이 비친다.
이렇게 생긴 두 절벽이 헤라클레스 기둥, 갈라진 틈이 지브롤터 해협이라고 신화는 전한다. 사람들은 해협 건너편이 지옥과 낭떠러지랬다. 이 세상 끝이니 인간 한계이기도 하다. 그런 곳을 보란 듯 빠져나가는 범선. 인류 역사상 신기원이자 위대한 도전이다. 범선은 어두컴컴한 중세 바다를 빠져나와 과학의 물결이 넘실대는 근대라는 대양으로 항진하는 배다. 돛들은 귀납법이란 강력한 바람을 받아 터질듯하다. 17세기 초 근대 과학의 문을 연 저자 업적을 책 표지가 말해준다. 천동설이 지동설을 여전히 눌렀던, 과학이 탄압받던 시절이었으니 보통 일이 아니다.

베이컨은 바티칸 심기를 잘 살펴 불똥을 피해 갔다. 책 표지 하단에 “많은 사람이 바삐 오가며 지식이 더하리라”는 다니엘서 구절이 그 흔적이다. 책 속에서 틈틈이 그랬다. 1권 93장에선 세계 탐험과 학문이 진보하는 현상은 하느님이 섭리로 정해놓았다고 설레발을 쳤다.

이 고전은 1권(130장) 2권(52장)으로 짜였다. 베이컨 학문 체계를 보여주는 6부작 ‘대혁신’ 중 2부가 바로 ‘신기관’. 1권은 귀납법이 무엇인지를 네 가지 우상을 예로 들었다(우상 파괴 편), 2권은 귀납법을 적용한 실례를 모았다. 시범 대상은 ‘열(熱)’. 그 본성을 규명하는 존재·부재·비교표를 작성해 가설 수립과 검증 과정을 설명한다(진리 건설 편). 사례 중심으로 서술하다가 얘기 맥이 뚝 끊겼다. 이론·실용에서 가치가 큰 27개 특권적 사례를 나열하던 중이었다.

연금술사의 실험실. 베이컨은 연금술 같은 유사 학문이 세상에서 퇴출돼야한다고 역설했다.
베이컨은 구시대 학문이 오류를 띠게 된 원인, 그게 고질이 된 이유를 1권 78장에서 92장까지 15개나 나열한다. ‘학문에 우호적인 시대가 매우 짧았다’로 시작해 ‘자연철학(자연과학)은 어느 시대건 찬밥이었다’로 이은 후 줄줄이 이유를 대다가 ‘절망·자포자기하는 시류 탓’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 논의 중 “이렇게 과거에 오류를 많이 범했다는 건 미래에 상대적으로 희망의 빛이 있다는 근거”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 빛은 조사·음미·숙고할 수 있는 ‘사례’를 통해 보여줄 수 있기에 괜한 말이 아니란다. ‘참된 귀납법’에 대한 낙관에서 나오는 주장.

이 고전은 부제가 ‘자연의 해석과 인간의 자연 지배에 관한 잠언’. 책 성격과 저자 자연관이 보인다. ‘앎이 힘이다’라는 표현, 1권 3장에 “인간의 지식이 곧 인간의 힘이다”로 등장한다. 그는 실용주의자.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 전체는 실천으로 완결되며, 정보는 우리 과업의 발단이며 실천은 그 종결이다.”(2권 44장) 저자는 인쇄술 화약 나침판이 등장한 세상이 변하는 기운을 느꼈다.

세 발명이 기존 학문이 생산한 게 아니라 자연에서 우연히 나왔다고 봤다. “자연엔 이 같은 이용후생 지혜가 숨어 있었고 인간은 그것을 찾아내면 된다!” 귀납법은 과학 법칙을 쉽게 발견하는 방법, 얼마나 대단한가 하고 뿌듯해한다(1권 129장).

그는 관찰·실험하는 힘, ‘참된 귀납법’이 미래를 밝혀 준다는 믿음이 굳셌다. 이리되면 인류가 우주를 지배할 날도 머지않았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네 가지 우상만큼은 경계하라고 말한다. 네 우상을 제거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이렇다. “계획한 실험을 통해 얻은 경험에서 중간 수준의 공리를 끌어냅니다. 이 공리에서 다시 새로운 실험을 찾아냅니다.” 중간 수준의 공리를 베이컨은 ‘사물의 형상’이라 부른다. 통상 ‘법칙’을 말한다. 베이컨식으로 말하면 “질료나 물체 속 단순 본성, 즉 그것을 지배·규제하는 활동 법칙”이다.

그는 이 과학 방법론을 좇아 2권에서 ‘열’을 탐구한다. 그 결과 “운동이 열의 유적 본성이고, 위로 향하는 팽창 운동과 물체의 작은 분자 간 저지 반발 격퇴 등이 신속하게 일어나는 팽창 운동은 열의 종적 본성”이란 결론을 내놓았다. 열이 특수한 성격을 띤 운동이란 이 주장은 당대는 물론 18세기까지 학계 반응이 신통찮았지만 19세기 이후엔 일반 상식이 됐다. 베이컨이 가진 통찰력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2권에서 베이컨은 ‘참된 귀납법’의 실례를 보여주면서, 현대 시선에서 볼 때, 허술하고 우스꽝스러운 설명을 자주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모습은 베이컨이 근대 과학 정신의 징검다리를 놓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쏟았는지를 가늠해보는 사례로도 읽힌다.

베이컨은 한 사물의 형상을 구하는 데도 자연지·실험지(實驗誌)를 숱하게 작성해야 하는 등 귀납법 적용은 절대로 개인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방대한 사업이라는 주장을 폈다.

처음엔 지식인이나 왕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과학 시대는 대세였다. 영국 왕립협회나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같은 새 과학단체가 잇달아 설립되는 순풍이 불었다. 과학이란 배가 가진 막강한 추진력을 확인한 학자들이 합심해 공동 연구하는 바람직한 풍토도 생겼다. 이로써 17세기 유럽발 과학 르네상스 시대가 열렸다. 오늘날 과학이 국가 기간산업이며, 재정 투입 부문으로 인정받기까지 베이컨이 초석을 놓았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저자는 실용 지식을 귀하게 여기면서도 학문을 당장 수익을 내는 사업으로 여기는 자세를 나무랐다. 이익 내는 ‘수익 실험’을 좇지 말고, 빛을 몰고 오는 ‘계명 실험’에 치중해 원인과 공리를 찾아내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잠언(1권 70장)을 남겼다. 진리를 아끼는 이 같은 시선은 근대 과학 철학자로서 베이컨이 쌓은 명성에 빛을 더해준다. 베이컨은 현재 디지털 세상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하는 물음표를 우리 앞에 던져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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