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의 여성이 다리를 벌리고 성기를 드러낸 채 거울을 보는 모습 등 성을 통해 삶을 드러내기, 역사의 질곡을 볼펜으로 그려 패러디하는 것을 비롯해 민담과 설화로 현실적인 문제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기, 세상의 주인이 인간이 아니고 사물인듯 현대문명과 사회적 상황에 의한 소외와 좌절 표현하기.

2021년 부산시립미술관 ‘거대한 일상:지층의 역전’전에 전시된 김춘자 작가의 ‘생(生)-88’. 국제신문DB

1990년대 초 서울 현대백화점 갤러리에서 열린 ‘풍경화, 그 해석과 비판의 소리’전에 참여한 작가 12명을 크게 세 가지 관점으로 분류한 것이다.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성을 기제로 한 삶 드러내기엔 김난영 양인진 안창홍 이흥원 정복수, 민담과 설화를 재해석하는 관점의 김성룡 박은국 최석운, 주체의 상실로 집약되는 이태호를 비롯한 이흥덕 정진윤 최진윤의 소외와 좌절 등으로 이들을 나눈 것은 미술평론가 강선학이다. 물론 강 평론가가 이들을 전시회 참여자로 선정한 것이 아니라 작품 세계를 분류한 것이다.

이게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이들 가운데 11명이 부산에서 활동하거나 부산 출신이라는 지역성 특성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부산형상미술의 특성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기존 구상화와 다른 형식적 급진성, 그리고 시대적 상황과 흐름에 대응하는 작가의 진정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강 평론가는 주장한다.

지금 봐도 예사롭지 않은 이들의 작품을 두고 당시 부산 미술계의 기성 작가들이 내놓은 반응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왜 만화를 그리느냐는 비아냥이다. 그림에 충실해야지 이야기를 집어넣으려 하느냐는 지적이다. 현실을 벗어난 초월적 아름다움이 주도하는 화단 분위기를 반영하는 말이다. 반대로 이들 작가는 개인의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그림에 담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또 하나는 몰인간성, 반사회성, 산업화 등 시대적 상황에 따른 인간의 소외와 상처, 그리고 이에 대한 저항이다. 예술은 이 지점에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이어야 하느냐고 자문하며 작가의 역할을 자문하는 진정성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작품에서 표현하려는 속뜻은 무엇이었을까. 성기를 다룬 김난영의 그림은 육체로부터 소외된 현대인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육체의 상실은 곧 세계의 상실을 의미하며, 육체가 없이 허상들만 가득한 세상의 야유라 하겠다. 안창홍의 경우도 도시의 폐쇄성과 성의 상품화, 가진자의 폭력, 금력의 횡포, 과소비 등을 고발했다. 정진윤은 사회와 개인에 내재한 폭력은 무엇인가 살피며 이를 아주 강한 색채 대비로 표현했다. 이에 따라 정진윤은 형상미술이 가지는 급진적 형상성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가로 꼽힌다. 또 이태호는 사물은 정상적으로 표현하는 반면, 인물만 흑백 필름의 음화처럼 뒤집어 소외를 극적으로 화폭에 나타내며 주목받았다.

2021년 부산시립미술관 ‘거대한 일상:지층의 역전’전에 전시된 송주섭 작가의 ‘세대’ 국제신문DB

부산에서 뿐만 아니라 이른바 미술계를 주도한다는 서울 미술계에서도 오해와 편견이 있었다. 이는 미술의 서울 중심주의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1994년 ‘월간미술’ 10월호에 실린 ‘구상미술을 다시 본다’ 특집 기사 중 오광수 신항섭 윤진섭의 좌담 내용 중 일부가 그 예다. “부산미술의 경향은 환상적인 꿈의 세계와 현실적 지역적인 열등의식을 잠재의식 속에 표출…”, “일본방송을 청취하는 부산사람들을 보더라도 일본의 영향이 강하다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이죠. 독버섯의 이미지와 통하는 괴기 취향은 우리의 취향과는 맞지 않습니다.”, “우리의 취향과는 다른 괴기적 성향이 보입니다.”, “부산에서 나타나고 있는 일련의 경향들에는 분명 일본문화의 감염 현상이 보입니다.”

부산미술 경향이 환상적인 꿈과 지역적 열등의식의 소산이라는 몰이해를 확인할 수 있다. 정치가 아닌 일상으로 눈을 돌리고, 일상의 삶이 어떻게 억압되는지에 대한 다양한 고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 하겠다.

아쉬운 건 이처럼 안팎으로 몰이해와 오해를 겪으면서도 부산에서 형상미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통한 가치 재정립 작업이 더디다는 점이다. 물론 부산시립미술관이 2020년 ‘부산, 형상미술’이란 학술세미나에 이어 2021년 ‘거대한 일상:지층의 역전’전을 통해 형상미술을 조명했으나 부산형상미술 전반을 꿰어 내기엔 미흡한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강 평론가가 최근 펴낸 평론집 ‘한 도시의 급진성 혹은 진정성-부산형상미술’은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데 한몫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형상미술은 1980년대 부산미술의 대명사로 통한다. 서울의 미술운동이나 추세와 다르게 자의든 타의든 부산미술의 특수성이나 정체성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시의 독일 프랑스 미국에서 나타난 신형상 미술이나 국내 정치 상황에 대항했던 민중미술이나 민족미술의 한 부류로 생각하지만 그런 연관성보다는 부산미술의 잠재적 특성이 부각된 것으로 판단한다. 시대적 흐름이 이를 고무시키고 현실화한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정치적 상황 판단이나 미술운동에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은 부산미술에 시대 흐름을 그대로 옮겨놓을 수는 없다. 게다가 1970년대 후반 1980년대는 부산에서 추상 열기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던 시기였다.”

우선 형상미술의 뿌리에 부산미술 초창기 작가들의 현실문제에 대한 사회의식이 닿아있다는 점을 확인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또 1980년대 형상미술을 통해 작가 세계를 구축한 배동환 김응기 안창홍 정진윤 송주섭 예유근 이태호 최석운 장원실 박경인 김난영 김미애 김은주 양인진 이혜주 노원희 허위영 정철교 김종구 김형균 김춘자 권영로 김현근 박은국 김성룡 한영수 김정호 등 작가들을 거론하며 형상미술의 뼈대에 살을 붙였다.

이를 통해 부산형상미술이 시대와 불화하는 예술인, 특히 부산미술인의 고민의 흔적이며, 민중미술과는 궤가 다른 부산의 독자적인 흐름이며, 미래 개척을 위한 비전을 기대할 수 있는 씨앗임을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