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어느 날 미루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길을 나서고 싶어졌어요. 아무도 미루를 붙잡지 않았어요”로 시작된다. 미루는 단발머리 소녀로 그림 속에서 꿈꾸는 듯한 눈을 하고 창밖을 바라본다. 그러더니 길을 나서서 걷고 또 걸으며 두고 온 모든 것을 잊는다. 여느 이야기와는 시작부터 좀 다르다. 미루가 지금 사는 곳이 괴로워서 떠났는지 단지 다른 세계가 궁금해서 길을 나섰는지는 모른다. 단지 그림 속 미루의 뒷모습은 단단해 보이며 길에서 만나는 것에 대한 큰 두려움도 없어 보인다.
그러던 미루가 나무 옆에 서 있던 주인을 잃은 그림자를 만난다. 주인은 쉬지 않고 일만 했고 따라다니다 지쳐 잠이 든 그림자를 두고 갔다. 둘은 여행을 이어가다 그림자로만 가득한 마을을 만난다. 미루는 겁을 먹지만 그림자는 자신만 주인을 잃은 게 아님을 깨닫는다. 그림자는 분명히 그 사람의 일부일텐데 우리는 일에 바빠 나에게 속한 어떤 부분을 잃고 있다는 말로 들렸다.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에게 더 다가올 만한 말이다.

계속 여행을 하다 그림자가 공격적인 사람들로부터 미루를 구해주고 미루는 그림자에게 ‘사과’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이름을 만들어서 불러준다는 건 누군가에게 의미를 주는 일이고 존재를 인정해주는 행위다. 찌그러진 모양의 그림자는 이름을 얻고 몸이 활짝 펴진다. 미루는 그림자에게 이름을 만들어주고, 그림자는 미루의 그림자로 늘 함께하게 된다. 내가 잃었던 나의 부분을 길을 떠나며 찾게 된다.

내용과 더불어 아주 공들여 칠한 그림도 감동이 있다. 보통 어린이책의 일러스트레이션처럼 마냥 밝거나 경쾌하지 않은 대신에 여러 번의 색 덧칠로 깊이감을 더해 상대적으로 차분하다. 그리고 아스라한 느낌까지 더해지도록 그려서 책 속의 일이 미루의 꿈 속에서 벌어졌을 지도 모른다는 느낌도 준다. 차분한 색감의 그림을 들여다보다 보면 복잡한 마음이 가라앉는 것도 매력이다.

최영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