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시대 이후 시·노래·일기 등
- 기록에 남은 연애사 28개 발굴
- 귀족·양반의 온갖 풍류와 퇴폐
- 당시 시대상 그려내듯 되살려

#부부의 오랜 사랑-미암일기

조선 중종 31년(1536년)에 혼인한 부부 유희춘과 송덕봉의 이야기는 남편 희춘이 무려 11년에 걸쳐 성실하게 쓴 일기 덕분에 상세히 전해진다. 이들의 혼인은 감수성 뛰어난 낭만청년과 당차고 시문이 뛰어난 문학소녀의 만남이었다. 희춘은 을사사화 이후 제주도와 함경도로 귀양 갔는데, 이때부터 부부 사이에는 20년의 공백이 생긴다.

옛 문헌에 실린 ‘연애사’를 탐구하면 그 시대의 문화와 사회, 정신이 보인다. 그림은 조선후기 풍속화가 신윤복이 그린 ‘월하정인’의 일부. 국제신문DB

일기에는 이 공백을 그들의 방식으로 채워나간 기록이 빼곡하다. 기개 높고 재주 많으며 품이 큰 아내 덕봉의 공이 컸던 것 같지만, 그런 아내를 존경하고 가부장의 권위를 험하게 부리지 않는 남편의 성정에도 비결이 있었다.

지나치게 해맑은 남편은 타지에서 ‘넉달이나 혼자 잤다(獨宿)’고 아내에게 뽐내는 듯한 편지를 썼는데 덕봉은 ‘사이다같은’ 답신을 보냈다. “예순의 나이에 혼자 잤다면 스스로 기운을 위해 이로운 것이지, 제게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것은 아닙니다”며 생색내는 남편에게 일침을 가하면서도 끝에는 “그래도 잘했다”며 어르기도 한다. 희춘은 이에 “부인의 말과 뜻이 다 좋아 감탄을 금할 수 없다”고 적고 있다. 그는 아내에게 작은 일로 칭찬받고 싶어하고 아내를 존경하는 사내였다. 또한 자신의 저술을 돕는 아내를 동료로서 의지하고 존중했다.

둘은 유머코드도 맞아 사이가 더 좋았던 것 같다. 유희춘이 한 번은 송덕봉의 콧대가 높은 것을 두고 “부인이 문 밖에 나설 때 코가 먼저 나가더라”고 놀리자 아내는 키 작은 남편 들으라는 듯 “남편이 길을 다니매 갓 끈이 땅을 쓸더라”고 받아친다.

#남사친 여사친의 러브레터

조선 영조 45년(1769년) 남원에서 같은 해 태어나 훗날 부부의 연을 맺은 남녀가 있으니 바로 하립과 삼의당 김 씨다. 비슷하게 대단한 명문가에 태어난 두 사람은 집안 간의 약속으로 정혼했지만 어릴 때부터 봐온 사이라 허물 없는 친구로 자란다. 약속대로 18세 혼례를 치른 두 사람의 첫날 밤 남편 하립이 먼저 시를 지어 읊는다. ‘깊은 밤 밝은 달에 한철 고운 봄꽃이라/꽃은 화려한데 달빛 또한 더해지네/달빛 좇아 꽃을 볼 새 내 임이 다가오니 둘도 없이 좋은 경치 내 집에 펼쳐지네’. 삼의당이 답시를 한다. ‘열여덟 선랑과 열여덟 선녀가 동방화촉 좋은 인연 맺었네/같은 해 같은 달에 나서 한 마을에 사니/오늘 밤 만남 어찌 우연이리요’. 시를 주고받으며 마침내 연인이 되고 부부가 된 두 사람의 삶은 이후 수많은 시문과 잡문으로 후대에 남았다.

‘사랑에 밑줄친 한국사’는 역사 속 사건과 인물의 ‘연애사’로 구성한 무척 흥미로운 미시사다. 저자인 이영숙 숙명여대 교수는 동아시아의 유교적 가치관에 억눌린 사회적 약자, 특히 여성의 삶과 사랑을 오래 연구해 왔다. 삼국시대 이후 시와 노래, 일기 등의 기록으로 남은 연애사 28개를 발굴해서 당시 시대와 문화를 그린 듯 되살려 놓는다.

고려시대 천하를 호령한 당대 최고 문신의 절절한 연애시, 여인들의 화전놀이를 시기한 양반 남성의 찌질한 조롱가와 ‘차라리 끼워달라고 하지’라는 가사로 돌려준 권 씨 여인의 노래, 귀족과 양반의 온갖 풍류와 퇴폐가 녹아든 시가를 통해 당시의 연애와 문화, 사회를 상상하는 재미가 크다.

신귀영 기자 ky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