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단 20년 돌아보는 선집 발간
- 과거 시집 4권 작품·신작 묶어
- “창작 끊으니 더 많은게 보인다”
- 더 큰 울림의 시에 대한 기대감

앞만 보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는 시점은 언제쯤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 이유는 비슷하다. 자신이 걸어왔던 발걸음에 고인 ‘그 무엇’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글을 쓰는 작가라면, 자신의 작품일 것이다. 전홍준 시인의 시선집 ‘흔적’에서 그 마음을 읽었다. 지난 20여 년간 낸 4권의 시집에서 가장 아끼는 시들과 최근의 시를 함께 묶은 시선집이다. 전홍준의 흔적이다. 그 흔적을 더듬어보는 동안 시인을 직접 만나고 싶어졌다. 전홍준 시인을 금정산 자락 찻집에서 만났다.

20년간의 시작을 정리하는 선집 ‘흔적’을 낸 전홍준 시인. 그를 금정산 자락의 한 찻집에서 만났다.

■닥치는대로 책을 읽던 소년

시선집의 시인후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금정산 범어사기슭에서 노년의 전매특허인 무기력증과 함께 늙어가고 있습니다.”

흔적- 전홍준 / 전망

전홍준 시인이 등단했던 20여 년 전부터 몇 번 만났던 기억으로는 이 문장에 수긍할 수가 없었다. 후기에는 ‘절필’이라는 단어도 보였다. 그래서 만나자마자 “시인이 시를 그만 쓰겠다니 말도 안 돼요”라며 불만(?)부터 토로했다. 전홍준 시인은 “그동안은 무엇을 보아도 ‘시’를 생각하면서 보았지요. 자연 풍경을 볼 때도 그랬습니다. 시라는 주술에 걸려서 저걸 어떻게 시로 쓰면 될까 생각했었죠. 그런데 지금은 편한 마음으로 봅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니까 더 많은 것이 보입니다. 이제야 자연을 제대로 보면서 즐기고 있습니다.”

전홍준 시인의 마음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필자의 생각은 좀 달랐다. 금정산자락에 난 도로를 따라 찻집을 찾아가는 동안 싱그러운 나무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나무들을 시의 소재로 보지 않고, ‘이제야 제대로 보면서 즐기고’ 있는 사람이 어찌 진정한 시인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시의 주술에서 빠져 나온 것을 축하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전홍준 시인이 이제부터 쓰는 시는 놓치고 싶지 않다.

전홍준 시인은 1954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때까지 전씨 일가 집성촌에서 살았다. “책을 좋아해서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책을 구해 읽었어요. 닥치는 대로 읽는 잡독이었죠. 그게 제게는 문학공부인 셈이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부터 부산에서 살았습니다. 마산의 인문고에 원서를 써두었는데, 마침 그때 누나가 부산으로 시집을 갈 때였어요. 마산에서 혼자 자취를 해야 하는 게 안쓰러웠던 매형의 권유와 부모님의 걱정이 컸어요. 그래서 제 뜻과는 무관하게 부산 경남공고로 진학하게 됐지요.” 온 마을사람들이 한 가족처럼 챙기고 감싸던 집성촌에서 큰 도시로, 문학을 동경하다가 생경한 공부를 해야 하는 학교로 온 소년 전홍준은 아픈 성장기를 보냈다. “읍내에서 10리는 더 들어가야 하는 마을에서 살던 제겐 마치 농경시대에서 갑자기 산업시대로 혼자 뚝 떨어진 기분이었어요.” 그 시절의 결핍과 상실감은 훗날 시의 자양분이 되어 주지 않았을까.

■시로 남기는 삶의 흔적

전홍준은 문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으나,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식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신경림 시인의 시, 1970년대 민중시, ‘창비’를 비롯한 계간지 등을 읽었다. 문학의 감성 위에서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면서 시를 공부하는 시간은 계속 됐다. ‘마당을 쓸면서’ ‘당신은 행복합니까’ ‘나는 노새처럼 늙어간다’ ‘아비의 호수’ 4권의 시집에 그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겼다.

시선집 ‘흔적’에는 4권 시집 속의 시와 최근의 신작 중에서 애정이 가는 작품을 골라 묶었다. 시선집은 ‘가족’ ‘자연’ ‘인생’ ‘사회’ 4부로 짜여졌다. 4개의 단어를 가만히 생각해본다. 우리의 삶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것들이다.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연을 묵묵히 바라보는 전홍준 시인의 시선이 느껴졌다.

4부로 따로 엮어 놓으니 각각의 주제를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따로 떼어놓고 바라보지 않았던 것도 알 수 있다. 시 ‘묵정밭’을 보면 시인의 그 마음이 보인다. 시 전문을 읽어보자. “산소를 다녀오다 큰골 밭둑에 앉았습니다/ 육십 년대 가족들 허기를 채워주던/ 하느님 같은 고구마가 잘 자라던 밭/ 아버지 삽날에 피를 철철 흘리며/ 하반신을 내어주었던 산의 분신입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언 십오 년/ 밭에는 설빔 차려입고 선물보따리 든/ 귀성객 같은 여린 다복솔들이/ 삼삼오오 서성거렸습니다/ 내 피와 살이 너에게 빚졌듯/ 이제 본향으로 돌아가는 그대에게/ 나 눈물로 배웅하노라.” 가족을 먹여 살리던 아버지의 인생, 가난했던 시대, 개간되었다가 다시 산으로 돌아가는 밭…. 시 한 편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시 ‘죽었다’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아프게 보여준다. “대형조선소 크레인이 무너져 여섯 명이 죽었다// 사장도 간부도 정규직도 아닌/ 파견노동자들이었다// 단지 숫자로만 기록되는 주검에게/ 푼돈 보상을 치르고 나면/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돌아가는/ 풍요로운 이 땅!// 비정규직은 죽음까지도 용역을 받았다.” 산업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고가 끊이지 않는데, 어느새 우리는 그 죽음에 무디어져 가고 있는 건 아닐까. 무디어진 양심을 두드리는 시를 쓰는 시인의 마음도 아팠을 것이다. 시선집 ‘흔적’은 전홍준의 흔적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흔적이기도 하다.

시인과 헤어질 때 다음 시집을 기다리겠노라고 단단히 말했다. 시를 쓰지 않으면 마음에 쌓인 말들이 폭발하는 순간이 오지 않겠는가. 시인도 시선집 후기에서 금단현상을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다. ‘시’라는 창문으로만 바라보는 세상은 어쩌면 한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창문 안에 갇혀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 창문을 깨버리고 담벼락도 무너뜨린 전홍준 시인은 무엇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더 활짝 열린 경계 없는 세상이 그의 앞에 있을 것이다. 시의 소재로 축소된 것이 아닌 세상, 시는 이러저러 해야 한다는 오만한 간섭이 사라진 세상이길 바란다. 그 세상은 지독한 금단현상을 불러올 것이다. 전홍준 시인은 어느 날 이름 석 자를 적다가, 자연스럽게 그 종이 위에 시를 쓸지도 모른다.

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