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량면에서 일본 유물 압도… 8000년전 시대상 연구 활력
- 인골 뒤덮은 대형 조개 더미, 정확한 성격 규명 새 과제로
- 함께 출토된 옥제품·흑요석…당시 中·日과 교역활발 입증

   
부산 가덕도 신석기 유적지에서 나온 6점의 옥제품.
8000년 전의 부산 가덕도 신석기 집단매장터는 발굴을 하면 할수록 우리 신석기 문화의 신비감을 더하고 있다. 지난 2월 다양한 매장문화 전모를 한눈에 보여준 데 이어 지난달 1일에는 일본과 우리와의 도래인(渡來人) 근원의 단서를 제공해 고고학계를 흥분시켰다. 마무리 조사 단계인 이번 발굴에선 당대인들의 최고 장신구인 조개팔찌와 목걸이가 인골과 함께 최초로 나와 그동안 일본 유물성과에 주눅들었던 우리 학계에 단번에 회심의 미소를 던지게 했다.

■한반도 첫 발굴 조개 목걸이·팔찌

   
부산 가덕도 신석기 집단 매장터에서 확인된 10개의 대형 장식용 조개껍데기가 나란히 덮여 있는 인골. 강덕철 기자 kangdc@kookje.co.kr
이번 추가 발굴의 최대 성과는 뭐니뭐니해도 40대 여성 인골에서 확인된 양팔에 있는 8개의 조개팔찌와 20개의 목걸이다. 목걸이는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조개장신구이며, 양팔의 조개팔찌도 최초다. 조개팔찌는 생활유적인 영도 동삼동패총에서 1500여 점(완형 조각편 등 합계)이 나왔지만 실제 착용 흔적이 보인 인골 관련 조개팔찌는 고작 전남 여수 안도패총에서 5개, 경남 통영 산등패총에서 3개가 나온 게 전부다.

반면에 이웃 일본은 다수의 조개팔찌가 확인됐다. 후쿠오카현 야마카(山鹿)패총에서 10~20개의 조개팔찌가 확인되는 등 규슈지역에서만 인골관련 조개팔찌가 여럿 나왔다. 이번 조개장신구는 우선 분량면에서 이런 일본 유물을 압도하고 있어 우리 신석기 문화연구에 전기가 될 것이 틀림없다. 지난 2007년 경남 창녕 비봉리패총에서 BC 6000년 전으로 추정되는 나무배가 처음으로 나와 이후 우리 학계에 신석기 목선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과 같은 효과가 기대된다.

   
흑요석.
현장을 둘러본 하인수(신석기시대 전공) 부산 복천박물관장은 "집단 매장터에 극히 일부에서 조개팔찌가 나온 것은 당시 이를 패용한 사람들이 특수한 역할 내지 신분이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조개팔찌를 특수 신분만이 착용하는 것으로 추정했으나 이를 뒷받침할 유적이 마땅치 않았다는 이야기다.

조개목걸이와 함께 10대 추정 인골의 상체를 덮은 대형 조개장식 꾸러미도 연구거리다. 하 관장은 "우리나라로선 미지의 신비한 유물이 나온 셈"이라며 "조개목걸이와 함께 정확한 유물 성격 규명에 따라 신석기 문화에 주요한 단서가 될 게 틀림없다"고 진단했다.

■중국 옥제품·일본 흑요석 출토

   
토기.
이 발굴에서 또 하나 놓칠 수 없는 것은 옥제품과 흑요석이다. 옥은 이번에 한 점이 더 나와 이 유적에서 모두 6점이 출토됐고 흑요석은 500여 점에 이른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신석기 유적에서 확인된 옥제품은 고작 한두 점씩이 나온 게 전부고 흑요석도 한 유적에서 최다 200여 점에 불과했다. 가덕도 유적에선 여태까지 나온 것을 모두 모은 것을 능가할 정도로 두 유물이 풍부하게 나왔다.

학계에선 화산재가 오래 굳어져 생긴 흑요석 생산지로 일본 서북 규슈의 고시다케(腰岳)지역으로 보고 있고 옥제품은 중국 요동반도의 홍산(紅山) 문화(BC 5000년~ BC 3000년)의 대표적 산물로 인식하고 있다. 가덕도와 바로 맞닿아 있는 영도 동삼동패총 지역이 조개팔찌 생산지임을 감안한다면 이곳 유적지가 조개팔찌를 매개로 북으로는 요동반도와 남으로 일본 규슈지역과 활발한 문화교류를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 학계는 공주 석장리 유적, 강원 영양 오산리유적 등을 잇는 경계로 위쪽은 북방문화권과, 아래쪽은 일본쪽과 교류해왔다는 것으로 추정했는데 이 가덕도 유적이 이를 뒤집을 개연성을 내포하고 있다. 유일하게 홍산문화와 규슈 문화를 다 수용한 교통·상업교류지였을 것이란 추정도 가능해진다.

김재현(고미술사학과) 동아대 교수가 "가덕도 유적에서 나온 풍부한 옥과 흑요석은 가덕도가 신석기 시대의 사통발달한 문화교류상 교통의 요지였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