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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쁘띠 마망’ 시공간 뛰어넘은 여성 삶의 연대기

조재휘 영화평론가 | 2021.10.20 19:25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이 강렬한 인상을 각인시키며 조명 받았지만, 사실 셀린 시아마는 이미 세 편의 장편을 만든 바 있는 어엿한 중견 감독이다. ‘워터 릴리즈’(2007)가 성년의 초입에 들어 사랑 앞에서 느끼는 소녀의 혼란스러운 감정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톰보이’(2011)는 남자아이로 위장한 여자아이의 자기 정체성을 다루었고, ‘걸후드’(2014)에선 삶의 주체성을 찾아 질서의 외부로 빠져나온 여성들의 연대와 성장을 보여준 바 있다. 작품들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길긴 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는 한 작가의 단편 소설집처럼 자기 세계를 다른 각도에서 변주하려는 발전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여성 주인공의 내밀한 감정을 들여다보는 동시에, 이들의 욕망을 금기시하고 억압하려는 질서의 관성, 권력의 시선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비춘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들은 공통된다.
‘쁘띠 마망’(2021)은 얼핏 보면 이전의 영화들과 사뭇 궤적을 달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근작에서 의외로 감독은 어머니와 딸이라는 보편적인 가족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외할머니를 여읜 넬리는 엄마 마리옹과 함께 외할머니가 생전에 살던 교외 숲 속의 집으로 향한다. 슬픔에 빠진 엄마는 먼저 집을 떠나고 아빠와 둘이 남게 된 넬리는 숲 속에서 또래의 소녀 마리옹과 만난다.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서로 닮은 두 소녀는 금세 친해져 우정을 나눈다.(밤에 두 사람이 침실에 있을 때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연출은 ‘벌집의 정령’(1973)의 오마주) 그리고 마리옹의 집에 놀러간 넬리는 일기장을 보고선 그곳이 머물고 있는 외할머니의 집과 같은 곳이며, 시간을 거슬러 어머니의 유년기와 마주하고 있음을 눈치 채게 된다.

영화는 자극이나 흥분 없이 생활의 호흡을 챙겨가는 담담한 무드로 일관한다. 중요한 건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손녀로 이어지는 여성 3대의 동일시(同一視)이다. 도입부에서 넬리는 할머니의 유품인 지팡이를 챙기고 있고, 엄마 마리옹과 넬리는 같은 포니테일 머리를 공유한다. 넬리의 이름은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어린 마리옹과 넬리는 쌍둥이 배우 캐스팅이며, 엄마 마리옹 역의 배우가 외할머니의 젊은 시절을 1인 2역으로 소화한다는 점에서 이 연결고리는 다분히 의도적이다. 엄마 마리옹의 뒷모습을 비추며 조용히 프레임 아웃하는 타이틀백은 중절모 쓴 남성의 뒷모습을 즐겨 그린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인물을 익명화시키면서 ‘쁘띠 마망’이 개별적인 인물의 특수성이 아니라 여성 일반의 이야기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어린 마리옹은 넬리와 놀이를 하면서 배우가 되고자 하는 장래의 꿈을 이야기하지만, 성년이 된 마리옹은 꿈을 포기한 채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고 있다. 그런 마리옹의 미래는 외할머니의 모습을 통해 예견되어 있다. 어쩌면 넬리의 삶 또한 외할머니와 엄마가 걸었던 길을 답습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나 그리고 둘’(2000)이 그랬듯, ‘쁘띠 마망’은 순환하는 삶의 연대기를 조감하려는 야심의 영화이다. 딸을 이해하지 못하고 억압하는 초자아적 존재로서 어머니상을 그려왔던 셀린 시아마는 ‘쁘띠 마망’에 이르러서는 살짝 관점을 뒤집는다. 꿈을 잃고 질서의 내부에 편입되어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을 비춤으로서,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을 이해하고자 하며 따스한 한 조각의 위로를 던지는 것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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