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다리의 첫사랑 추억

요즘은 컴퓨터, 휴대전화기 등 최첨단 정보기기가 발달해 있어서 손으로 편지를 써서 친구를 사귀는 ‘펜팔(Penpal)’이란 말을 쓰는 일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50대 초반의 중년인 내가 청소년 시절을 보낼 무렵에는 펜팔이 상당히 유행했었다. 월간이나 주간으로 발행되는 잡지 뒷면에는 관행적으로 펜팔 난이 있었고 잡지를 보다가 펜팔 난에 적힌 이성에게 편지를 보내 교제를 원하는 일이 많았다.

경남 사천의 시골에서 천진난만한 사춘기를 보낸 내게 펜팔은 상당한 관심거리였다. 봉건적인 가풍과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이성을 사귈 기회와 용기가 없어서 편지로 이성 친구를 한 번 사귀어 보자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당시에 나는 틈틈이 청소년 잡지를 구입해 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즐겨 보던 월간지 1월호에 있는 하나의 이름이 유달리 나의 눈길을 강하게 끌었다. 이름이 ‘김미향’이고 나이가 나와 같았으며 주소지는 부산 영도구 청학동으로 돼 있었다.

나는 글 솜씨가 그다지 출중하지는 않았지만 용기를 내서 김미향이란 여학생에게 나의 진실한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썼다. 이름이 좋아서 얼굴도 예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고 정성스럽게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소개하는 글을 써서 보냈다. 열흘 정도 지나서 답신이 왔다. 그녀는 고향이 경남 합천이고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 부산으로 왔으며 가정형편이 어려워 낮엔 회사에 다니고 밤엔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며 주경야독하는 학생이자 근로자라고 했다.

우리는 그때부터 한 달에 한두 번 꼴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를 잘 쓰기 위해 책을 자주 보았고 틈틈이 편지 속에 예쁜 단풍이나 책 속의 풍경사진을 오려서 동봉해 보내곤 했다. 서로 간에 인물 사진도 주고받았다. 글로 희로애락의 감정을 표현하다 보니 은근히 좋아하는 마음도 생겼다. 편지를 계속 주고받다가 여름방학이 되어 바로 위의 셋째 형과 둘이서 부산여행을 하게 되었다. 둘째 형이 부산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있어서 형님 집에서 숙식하기로 하고 2박3일 일정으로 부산을 찾았다. 부산에 온 김에 그 펜팔 친구도 만나보기로 했다.

그녀의 의견에 따라 우리는 부산 영도다리 위 중간쯤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 약속 시간이 돼서 그녀와 나는 감격의 만남을 가졌다. 사진과 달리 그녀는 청순하고 발랄해 보였고 나에게 묘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녀도 내가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우리는 영도다리에서 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가 남포동 극장가로 와서 주전부리를 사 먹고 영화도 한 편 보았다. 또한 용두산공원을 거닐며 질풍노도의 시기에 일어나는 갖가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녀와 나는 시골 출신이고 사는 처지가 비슷했으며 성격마저도 통하는 데가 많았다. 우리는 앞으로도 자주 편지를 쓰고 서로를 격려하며 좋은 사이로 지내자고 다짐했다.

그녀와 나는 처음 만난 영도다리 위로 가서 후일을 기약하며 아쉽게 헤어졌다. 그 뒤로도 그녀와 나는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이렇게 1년에 두 번에 걸쳐 그녀와 나는 부산에서 만났다. 내가 사는 곳은 시골이어서 그녀를 초청하기가 여의치 않아 내가 부산으로 가서 그녀를 만났다. 우리는 늘 영도다리에서 만나 다정하게 손을 잡고 남포동 일대를 거닐었다. 가끔은 태종대를 찾기도 했다. 부산 앞바다를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길렀고 미래의 세계를 꿈꾸곤 했다.

그녀는 도시생활을 나보다 많이 해서 그런지 좀 세련돼 보였고 말도 더 유창하게 잘했다. 나는 왠지 그녀 앞에서는 기가 죽는다는 것을 느꼈지만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나의 일거일동을 칭찬하며 내게 좋은 모습을 보였다. 내가 참으로 좋은 여자 친구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녀와 있는 시간은 한없이 행복하고 즐거웠다. 그녀와 같이 있으면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게 시간이 흘렀다. 사랑에 빠지면 무엇이든 좋게 보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마저도 던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2년가량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다가 답신이 끊겼다. 나는 수차례 더 보냈는데 그녀로부터 더 이상 답신은 오지 않았고 내가 보낸 편지도 주소불명으로 되돌아 왔다. 짐작하건대 그녀에겐 나 보다 더 좋은 사람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나는 갑자기 닭 쫓던 개 지붕만 쳐다보는 격이 돼 버렸다. 그녀도 내가 가난하고 시골 출신이어서 사귀어봐야 이득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성에 대한 사랑을 처음 알았던 나는 며칠 간 심한 몸살을 앓았다. 그야말로 사랑의 열병이었다. 나는 그녀의 주소를 들고 부산 청학동으로 한 번 찾아가볼까 하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선뜻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내게 첫사랑의 감정을 지니게 했던 그녀는 사내 가슴에 커다란 슬픔을 남긴 채 떠나가 버리고 말았다. 나는 한 동안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어차피 나와는 인연이 아닐 것이라고 애써 위로하며 용기를 내서 그녀를 기억 속에서 지우기로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 집안이 어려워 대학진학은 못했다. 힘겹게 2년 반 동안의 군대생활을 마치고 큰형을 따라 우리 가족은 전부 부산으로 이사를 왔다. 나는 제빵업체, 건축자재제조업체, 자동차학원 등을 전전하며 성실하게 직장을 다녔다. 마지막에 선택한 직업이 공개채용을 통한 부산지방기능직공무원이었다. 돈을 알뜰하게 저축하여 결혼비용을 모은 뒤에 옛날 첫사랑을 잊은 채 맞선을 봐서 현재의 아내와 결혼을 하여 지금껏 살고 있다.

얼마 전에 영도다리가 영도대교로 이름을 바꾸고서 도개기능을 갖추고 새롭게 개통하였다고 해서 감회가 남다르다. 영도다리를 볼 때마다 어렴풋이나마 청소년 시절에 겪은 첫사랑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영도다리는 내가 처음으로 이성에 대한 사랑을 절실하게 느낀 추억의 장소다. 그녀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처럼 그때의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느 시인은 “그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그리움을 간직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 시인의 말처럼 나는 간혹 펜팔친구이자 첫사랑이었던 그녀를 만나고 싶은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으니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나이 지천명을 지나 첫사랑 운운하는 것이 좀 우습지만 젊은 시절의 아름다웠던 한때를 생각하며 살포시 추억에 잠기는 것은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유행병도 전염병도 아니면서 누구나 한 번 이상은 앓게 되는 것이 사랑의 열병이라고 했다. 사춘기 시절에 앓았던 펜팔친구와의 첫사랑 열병은 지나간 일이지만 내겐 아주 소중한 추억이고 과거를 되돌아보며 미소를 짓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녀도 지금 살아있다면 펑퍼짐한 아줌마가 돼 있을지 아니면 생업의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원숙한 여인이 돼 있을지 모르지만 설혹 만날 가능성이 있더라도 만나지 않고 그냥 지나치고 싶다. 다시 만나 펑퍼짐한 아줌마의 모습을 보면 실망스러울 것이고 교양 있는 원숙한 여인이라면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 가슴이 아플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 청순했던 그녀의 이미지를 생각하며 가슴 한 구석에 소중한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다.

인간은 추억의 동물이라고 했다. 나는 살아가는 틈틈이 삶이 고달프거나 군중 속의 고독을 느낄 때에는 영도대교를 찾아가 첫사랑을 추억하며 나의 삶을 위로받고 싶다. 그녀와 보낸 애틋한 추억을 되새기며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하고 싶다. 비록 불발로 끝난 첫사랑이지만 내겐 추억의 뒤안길을 서성이게 만든 한때의 아름다웠던 시간이었다. 새롭게 변신한 영도대교는 예전의 명성을 되찾으며 부산시민뿐만 아니라 부산을 찾은 관광객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젊은이에겐 이색적인 볼거리로, 중장년층에겐 옛날을 추억하는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내가 근무하는 일터도 영도대교와 멀지 않아서 찾기가 한결 쉽다. 부산시민에게 갖가지 추억과 애환이 서린 영도대교는 부산의 명물로서 손색이 없다. 영도대교가 부산시민뿐만 아니라 외지인에게도 톡톡한 사랑을 받으며 부산의 마루지로 굳건히 자리매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청소년 시절의 아련한 첫사랑 추억이 담긴 영도대교를 바라보며 무미건조한 일상을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이 내가 지닌 작은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