돗다리

돗다리가 다시 앙천기립(仰天起立)한다고 한다. 매일 정오, 15분간 상판이 일부 들림으로써 영도가 잠시 뭍과 단절되는 역사(役事)로 인해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단절돼 온 영도에 대한 나의 기억은 다시 이어지게 됐으니 진정 아이러니다.

돗다리는 영도구봉래동5가66번지에 삶의 터를 잡았던 내 부모님들에겐 소중한 가족사를 형성케 해준 징검다리이자 38년 전 영도를 떠났던 나에겐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무대이다. 잦은 안개가 연안여객선의 뱃고동 소리를 감싸안아 더욱 처연케 했던 돗다리는 언제나 내 시선의 각도 안에서 머물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시야에 들어오던 그곳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있던 용두산공원과 앙상블을 이루는 「자웅(雌雄)모자이크」였다. 돗다리는 이른바 ‘좀 논다며 거들먹거리던 학생들’이 부르던 영도다리의 애칭이었다.

경북청도가 본향이었던 선고(先考)께서 피압박 일제(日帝)시대의 젊은 시절, 일인이 경영하던 상회의 점원으로 일하다 누명을 쓰고 일경에 끌려가 잔혹한 고초를 겪은 끝에 실의, 새악시와 어린 남매마저 두고 고향을 떠나와 볼트공으로 정착한 곳이 조선중공업이었는데 조선중공업을 찾아오며 다리를 지키던 일경의 검문이 두려워 어렵사리 통통배를 탔다고 했던 그 영도다리. 선고께서 조선중공업에 입사한지 이태만에 시골에서 농사짓던 선비(先妣)께서 남편을 찾아 왔던 것인데 물어물어 하숙집으로 찾아온 어머니에게 제일먼저 물어본 말이 “영도앞바다를 어떻게 건너왔느냐”는 것이었다 한다.

어머니는 돗다리를 건너 오시며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지아비를 찾아오는 불안하고 가슴 설레는 고단한 길임에도 어디 일할 곳이 없을까를 살폈을 정도로 생활력이 남다른 분이셨다. 그런 어머니의 눈에 돗다리에서 불과 반마장 거리 경질조선도자공장의 커다란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보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나 아버지가 하숙잡아 계시던 조선중공업 위 빈촌 마을의 「째보(아줌마)집」 부근에 방을 세얻어 영도시대를 열며 살림을 꾸리셨다.

아버지의 인생고비는 끝도 없어서 한국전쟁 시기엔 보도연맹의 조직원으로 몰려 돗다리 옆에 있던 수상경찰서에 수감돼 숱한 사람들이 사형받아 나가는 참혹한 광경도 목도하셨다.

모든 이가 그랬듯 해방~동란으로 이어진 격동기에 아버지 어머니는 삶이 힘들 때마다 돗다리의 기립을 보시면서 용기를 잃지 않으셨다 했다. 딸 둘, 아들 둘 중 아들둘을 혹독한 피압박시대의 굶주림과 질병에 잃고 두 딸을 더 둔 아래로 내가 장남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은 한국전쟁이 아직 진행중이던 1952년이었다. 그 때 어머니는 눈여겨 봐두었던 조선도자공장에 물레공으로 취업해 그릇 빚는 일을 하셨다. 조선도자공장의 명칭이 대한도기로 바뀐지 10년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취업규정상 갓난 아기를 동반할 수 없어 나는 집에서 큰누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정오사이렌에 맞춰 엄마젖을 물기 위해 큰누님의 등에 업혀 길고 험한 언덕길을 내려가야 했다. 물론 내가 누님의 등에 업혀 다녔던 기억이야 나지 않지만 내가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밥그릇으로 썼던 화초문(花草紋) 사발에 대한 기억은 또렷하다. 대한도기엔 대한민국의 유명 화가들이 여럿, 그릇에 그림을 그려넣는 일로 밥벌이를 하고 있었다니 이빨 빠진 내 밥그릇의 화초문도 변관식이며 김은호 이중섭 등 근세 대한민국의 화단(畵壇)을 풍미했던 그 어느 대가의 그림이었을 것이다.

봉래동5가66번지에선 뭍을 바라보는 시야의 왼쪽으로 천마산 시약산 구덕산의 위용에 대칭되게 엄광산 백양산 황령산이 오른쪽으로 아스라한 자태를 마치 장막처럼 드리우며 엄청난 기세를 담은 대한민국 부산의 진면목을 감싸안고 있었는데 나는 그 어느 곳보다 돗다리를 건너가 보고 싶었다. 하루에 두 번씩 번쩍번쩍 상판을 들어올린다는 돗다리는 어린 내 꿈속에 자주 등장하는 미취학 소년시절의 소풍명소였다.

어머니는 지혜로운 분이기도 했다. 도기공장에서 받은 월급을 꼬박꼬박 모아 자그만 점방을 차리신 것이다. 물류(物流)가 원활치 않았던 당시의 생활상을 분명히 읽으신 것이었다. 그래서 시작한 가게운영이었지만 장보러 가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었다. 영도시장이며 자갈치시장은 물론, 국제시장으로 어머니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운반수단은 오직 이고 다니시는 것이었다. 장보러 다닌 어머니를 따라 나는 처음 돗다리를 건너게 됐는데 자갈치시장의 다꾸앙(단무지)공장 앞에서 어머니가 나머지 장을 보고 오실때까지 새끼새가 두려워하듯 불안한 눈초리로 장바구니를 지키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장바구니를 지키며 제5육군병원터에서 대척점인 대로변 광복동거리 입구 시민관 극장의 간판 글자로 한글을 익히는 일은 참 즐거웠다. 한글과 한자(漢字)가 반반씩 섞인 간판들이었는데 한자도 기억해 두었다가 아버지에게 물어 한 글자씩 익히는 재미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때쯤 아버지는 조선공사를 그만두시고 적기(赤崎)와 영도청학동(靑鶴洞) 창고를 오가는 미창(米倉)의 경비원으로 일하셨다.

어머니의 가게는 번창했다. 담배판매점 허가까지 낸 가게는 우리 일곱남매를 양육하는 바탕이 됐고 ‘담뱃집아아들’은 잘도 자라주었다.

내가 내 꿈속의 소풍명소 돗다리를 실컷 건너다니게 된 것은 토성동에 있는 경남중학교에 다니게 됨으로써였다. 영도의 조그만 국민학교 출신 촌놈이 교복 양소매의 쌍백선(雙白線)으로 유명한 경남중학교에 합격했으니 기적 같은 그 일은 아마 나의 실력이라기보다 강인한 생활력으로 점철된 부모님의 기도 덕분이었을 것이다. 나의 노력이 조금이나마 더해졌다면 그것은 셋째?넷째 누님이 부산여중?고에 합격해 입학한 장한 모습에 자극받은 결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아이들이 참한 수재들로 자랐다는 소리가 근동에서 돌자 어머니는 무척 기뻐하셨다.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 중반, 청학동에서 돗다리를 왕복하는 버스는 물론 여타 코스의 대중교통 사정이 무척 열악해 나는 매번 학교까지 걸어다녔다. 하루 세 시간 이상을 도보로 통학한 두 다리는 아직도 나의 건강을 지켜주는 대들보로 중학교 시절 단련됐다. 돗다리의 도개 부분 인도는 목재였는데 목재가 삭아 쑹쑹 구멍이 뚫려 대단한 스릴을 느끼게 했던 돗다리 보행도 1966년,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돗다리 도개(跳開)가 중지되면서 끝나버렸지만 자칫 발이 빠질 수 있을 정도로 위험스런 그 구멍사이로 보이던 잽싼 선박의 통행과 포말(泡沫), 선박의 뒤를 따르던 갈매기떼의 기억은 아주 생생하다.

영도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때때로 푸대접을 받기도 했다. 영도주민의 이미지가 어쩌다 “촌스럽다.”는 인상으로 각인됐는지 몰라도 「영도사람」, 혹은 「영도출신」이라고 하면 한 수 낮춰보는 시선이 형성돼 있었고 영도출신들은 그걸 감내해야 했다. 오히려 그런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의 인격을 천박하게 여기며 젊잖게 무시하기조차 했지만.

나의 중학교시절은 행복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매일 세시간 이상을 등하교의 보행에 소비해야 하는 고단함과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비(非)영도출신학우들의 교만함으로 영도출신들은 그저 장기판의 사졸(士卒)정도의 대우에 주눅들어야 했다. 더욱이 나는 중학 2년 시절, 우연히 알게 된 늙고 병든 중공군장교출신 탈영병 아나키스트 한 사람의 위험한 좌파적 사상에 매료돼 소년모주꾼으로 전락, 학업을 등한시 하는 파란을 겪기도 했다. 그 결과 경남중학교 출신이면 당연히 진학한다는 경남고 입학시험에 불합격하고 영도에 있던 부산남고에 입학, 재기를 노려야 하는 딱한 처지가 됐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68년 2학기의 어느날. 그날도 술을 마시고 등교한 나는 교장실에서 엄청 혼나고 교무실의 거울을 통해 일그러진 나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순간 “여기 거울에 비치는 자는 누구인가 ?”라는 생각이 들면서 지난 3년의 시간이 되돌아 보였다. 죽고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후회막급이었다. 그날 방과후 남항동 등대에서 마신 독(甕)소주를 끝으로 지난 시간의 굴레를 벗는 허물벗기를 시작하며 변신해 나갔다. 그리고 1년뒤 초겨울, 학업우등생으로 탈바꿈하며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합격하는 작은 혁명을 이뤄낼 수 있었다. 나의 변신을 기뻐하며 그토록 혼내시던 정신득교장선생님께서 졸업식 전날 돗다리밑 선술집에서 잔소주 석잔을 사주셨다. 일찍 인생사의 쓴맛 단맛을 핥은 나는 동양철학에 빠지게 됐고 돗다리 위에 있던 점집, 초재상(草材商)을 드나들며, 사주며 작명, 수상?관상 관련 책들을 구입해 열심히도 책장을 넘겼다.

대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해 들뜬 나에게 또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명의 아들을 적빈의 병마에 잃어버린 부모님께서 빨리 손자를 안고 싶다며 나에게 조혼(早婚)을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인생여정을 알고 있기에 답답했지만 적극 거절하지 못한채 우울한 심사를 달래기 위해 내가 자주 찾은 곳은 돗다리가 지척인 부둣가 선창의 포장마차였다. 포장마차엔 동아대학교철학과생인 성무형도 단골로 찾아들었다. 성무형은 봉래동 홍등가의 아가씨 금앵(金櫻)을 사랑한 것이 빌미가 돼 조선사업을 한 형의 아버지와 의절에 가까운 심한 갈등을 빚고 있었고 그것이 원인이 돼 군입대후 첫휴가의 귀대길에 달리는 열차에서 투신해 세상을 버렸다. 소식을 들은 금앵도 안개낀 가을날 영도선창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했는데 나의 대학교2년생 때인 1971년에 있은 일이었다. 금앵에게 성무형의 소식을 전했던 나는 그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는데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안타까운 기억의 한 자락이다.

창녀 금앵의 장례식이 열린 밤 아홉시 봉래동 홍등가, 안개낀 밤 돗다리의 실루엣. 워터프론트를 연상케 하는 봉래동 사창 거리 적산 가옥의 비린내. 나는 언젠가 영도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시기는 1976년 가을이었다. 이미 세 아이의 아버지가 돼버린 나는 군제대후 쫓기듯 일자리를 찾아 영도를 떠났다. 대구의 어느 일간지에 졸업예정자의 자격으로 수습기자에 합격한 나는 첫출근을 위해 부산역서 통근열차를 타기 위해 아내가 새벽동자로 갓지은 밥을 먹고 돗다리를 건넜다. 영도의 교통사정이 열악하기는 1970년대도 여전해 새벽버스는 물론 새벽택시조차 귀했다.

안개를 헤치고 돗다리를 건너며 나는 성무형을 다리위에서 미소짓는 영혼으로 만났다. 성무형의 옆엔 금앵이 슬픈 표정의 웃음으로 배웅해 주며 “꼭 돌아오라.”고 속삭였다. 고향을 떠나왔던 아버지의 슬픈 사연도 되짚어 보았으며 돗다리 드는 시각에 교묘히 맞춰 종종걸음 치면서 쌀가마며 짐을 빼돌리는 수법으로 도둑질을 서슴지 않던 늙은 지게꾼들의 얍삽한 눈가 잔주름도 떠올려 보았다.

어느새 38년이 지나가 버렸다. 38년이면 이미 광음의 아름다움과 총기(聰氣)는 사라지고 느슨한 세월의 추한 몰골만 남게 돼버리는 긴 시간이다. 그리고 또다시 돗다리를 든다는 소식이 산재장애자로 퇴직해 은둔한 나의 골방에까지 들려왔고 나는 끝내 영도생각에 몸살을 앓는다.

조내기고구마도 먹고싶고 소주병과 냄비 하나 달랑 들고 전마선 타고 건너간 아치섬에서 태평양의 물살을 느껴보던 추억의 풍광도 되살려 보고싶다. 무엇보다 고교시절 주먹서클 주도권 확보를 위해 주먹판을 벌이며 꼭 돗다리를 배경으로 삼았던 ‘논단이’들 얼굴이 떠오른다. 질낮은 언변으로 내 앞에서 이태백을 입에 달고 거들먹거리던 녀석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지 ? 더러는 주천극락(酒泉極樂)으로 열반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어쨌든 빠른 시간 내에 「영도 브리지(YD bridge)」앞에 스탠딩하고 싶다. 그리고 그 위에서 이방인을 만나면 말해 주고 싶다. 영도는 어느 골목 치고 구구절절 SS(Street Story)를 간직하지 않은 곳이 없다고. 그리고 그 누군가로부터 듣고싶다. 내가 영도를 비운 38년간의 얘기를.

“영도도서관도, 그 앞의 국수집도, 곰장어구이집도 언자 문을 다닫따 카제 ? 하기야 그기 언제쩍 풍경인데 ! ”

금앵의 장례식날 적은 한시 ‘于船艙(선창에서)’를 어제저녁 꺼내 읽어보았다. 연필로 적은 글자가 공책과 함께 변색돼 곧 사라질 것 같았다. 거기에는 43년의 세월이 잠겨 있었다.

蓬萊洞船艙(봉래동선창) 夜花發散香(야화발산향) 洞狗潛赤産(동구잠적산) 彎月枯渴彰(만월고갈창)

봉래동선창의

야화들이 향기 내뿜으면

골목길 개새끼들 적산가로 숨어 들고

손톱달만 고갈산 위에서 서글피 밝은데 …

甲午년2월. 대구 거주 박해봉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