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강 낙동강 수필 공모전 장려상목록으로
속삭임
장혜경올해는 유난히 민들레가 많이 핀 것 같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눈이 닿는 곳 마다 온통 노란 꽃 투성이더니 이제 솜털 가득한 홀씨들이 이리저리 나비처럼 날아다닌다. 내 키보다 훨씬 큰 갈대숲을 헤치고 나가면 한가로이 헤엄치는 물새들과 가끔 수면위로 뛰어 오르는 물고기들이 반긴다. 하루하루가 휙휙 스쳐 지나가고 강바람이 싫지 않을 만큼 계절은 성큼성큼 앞서 가고 있지만, 넓은 풀밭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에게 시선이 머물러 한참동안 발걸음을 멈추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나이에 따라 세월의 속도감이 달라진다더니 아이들이 자라고 귀 밑 머리가 하얗게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실감이 난다.
산책길의 동반자인 남편의 성정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이 없다. 강산이 세 번은 더 바뀔 세월이건만 그 한결같음이 신혼 때는 답답하기가 더 할 나위 없었고, 십 년 쯤 지나니 그러려니 여겨지다가 또 십 년을 지나보니 그 냥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늘 감사하고 고맙다.
삼십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며 축구와 달리기로 운동장을 주름 잡았었는데 세월을 이길 장사는 없다더니 명예퇴직을 하고 난 다음 해에는 뇌경색으로, 그 다음 해에는 심장에 문제가 생겨 스텐트 삽입을 하는 수난을 겪었다. 겉으로 보기엔 더 할 나위 없이 편안한 사람인데 속으론 스트레스가 많았었나 싶어 시간 날 때마다 강변으로 나오곤 한다. 여기저기 문제는 생겼지만 다행스럽게 심각한 후유증 없이 회복이 되어 감사할 따름이어서 전문의의 조언에 따라 잘못 된 식습관도 고치고, 생활 습관과 운동 패턴도 바꾸는 중이다.
강가에 서면 불편한 몸을 지팡이에 의지하고 하염없이 강을 바라보던 아버지가 떠오른다. 멋지고 존경스러웠던 아버지는 내게 우상이었고 그 분처럼 되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 그랬던 그가 쓰러지다니….
사업 실패 후 얻은 지병으로 이북에 두고 온 고향 대신 아버지가 찾은 곳은 구포. 압록강 하구의 평야와 염전이 유명하다는 평안북도 용천이 고향인 아버지는 고향이 그리워 강이 가까운 곳을 선택하셨다고 했다. 아버지가 강변을 산책하러 나갈 때면 어머니는 항상 걱정스런 표정으로 아버지 손에 내 손을 쥐어주곤 하셨는데 어머니가 그런 표정을 짓는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와 강변에 나가는 것은 언제나 즐거움이었다.
그 무렵, 구포 역 앞 낙동강 둑길은 개나리가 일품이었다. 장마철엔 둑의 턱 밑까지 물이 차오르고, 가끔 인근 도로까지 침수가 되어 물난리를 겪었던 기억도 난다. 하구언 수문 근처까지 펼쳐진 습지는 철새 도래지인 을숙도가 유명하지만 열 살 아이가 걸어서 가기엔 너무 멀었고 대부분 농사를 짓고 있어서 둑을 거쳐 구포다리 난간에서 강을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다리 난간에 기대어 내려다보고 있으면 강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내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에 탄성을 지르기도 하고 깡총깡총 뛰기도 하며 얼마나 좋아 했었는지 모른다. 한참을 조잘거리며 걷는 동안 아버지는 얼굴이 밝아지셨고 주변이 어둑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발길은 집으로 향했다. 강을 보며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아버지와 함께 강을 바라보던 구포다리는 오랜 세월을 버티다 지금은 사라지고, 아이였던 나는 흰 머리카락을 감출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지난 몇 년간 강변은 예전 모습이 상상이 안 될 정도로 변했다. 이리저리 곳곳에 놓인 작은 다리들은 샛강과 습지를 연결하며 마치 유럽 어느 마을에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인생 2막을 시작하며 우리 부부는 적절한 일과 적절한 휴식을 유지하기로 하고 남편은 삼십년 은행원의 기억을 뒤로 하고 집 근처 편의점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괜찮겠냐고 했더니 “까짓것 해 보는 거지. 뭐 별거 있어?”라며 씨익 웃는다.
육십을 코앞에 두고 남편의 손을 잡은 채 오늘도 노래하듯 춤을 추듯 함께 걷는다.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하던가?
“얼마나 힘들었어요?”라는 말 대신 같이 하늘을 보고, “많이 아팠죠?”라는 말 대신 강가에서 노을을 기다린다. 강은 내게 위로이자 응원이다. 그 위로와 응원을 받고 나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이 생긴다.
풀밭에 누우면 세상은 어느 새 품 안에 있고, 세상에서 묻었던 회색빛은 하늘처럼 비워진다. 하늘을 채운 푸르름과 들판에 가득한 싱그러움, 귓가를 맴도는 맑은 새 소리는 강물과 어우러져 시름을 덜어 주고 다리 건너 보이는 작은 섬은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인 듯하다. 팍팍했던 삶에 초록빛이 스며들고 하얀 솜털은 나비가 되어 날아간다. 꽃망울을 준비하는 연잎 들이 가득한 연꽃 단지는 인생 2막을 열어가는 우리 부부처럼 여름을 기약하며 설레는 기다림으로 채워지는 중이다.
아버지의 고단한 삶도 강이 위로가 되었을까?
“힘들었지? 그동안 수고했어. 힘들 땐 언제든지 찾아 와 쉬어 가도 된단다.” 강물이 바람이 되어 내게 속삭인다. 그 속삭임이 많은 사람들에게 들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