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강 낙동강 수필 공모전 장려상목록으로
너도 그래야 돼
김경애더위가 한풀 꺾인 여름날이다. 열한 살 남자아이가 집에 있던 돈 십 환을 훔쳐 사탕을 사먹고 해가 기울어질 때쯤 집에 들어오는 장면인데 예사롭지 않다. 햇빛에 그을려 반짝반짝 재첩 같은 얼굴을 한 아이 손에는 까만 비닐봉지가 매달려있다. 아버지가 아이 목소리만 듣고도 호통부터 쳐대니 들어올 수가 없다. 대문 입구에 여주덩굴이 우거져 아버지에게는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아이 눈에 구정물통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아기 발가락이 보인다.
“얼라가 구정물통에…”, “에이 이놈의 손이…”
잠시 후 또,
“얼라가, 구정물통에 빠졌어요”, “이놈의 손이 돈 훔쳐 갔제”
똑 같은 대화가 되풀이 되고 있다. 한쪽은 사정이 급한데 다른 쪽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 아이는 심각했다. “얼라가 구정물통에 빠졌다” 아버지 코앞까지 달려가 젖 먹은 힘을 다해 고함을 지른 후 대문 밖으로 줄행랑을 친다. 그때서야 아버지 눈길이 구정물통으로 간다. 눈은 이미 초점을 잃었고 호흡도 멈춘 상태다. 발목을 잡아 거꾸로 들고 배와 등을 여러 차례 두들기니 꼬르륵 소리와 함께 입에서 구정물이 졸졸 흘러나온다.
마당에 재첩이 까맣게 뒹굴고 있다. 아이가 방금 내팽개친 것이다. 종일 낙동강에서 물장구치고 놀며 잡은 재첩이다. 재첩은 아버지 해장국으로 으뜸이었고 가족 모두가 둘러앉은 밥상에 사흘이 멀다 하고 오르내렸다. 요긴한 재첩이 그날만큼은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십 환 때문이다.
큰일 날 뻔했다. 세 살짜리 아기가 방문 틀을 넘고 마루와 축담을 지나 마당까지 내려와 구정물통을 덮쳤다. 어머니는 두 살 터울 동생에게 젖을 물리고 있으니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구정물통에 간간이 붙어있는 밥풀을 따라간 모양이다. 동생에게 젖을 빼앗긴 아기가 배가 고파서였을까.
나는 그렇게 다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다. 훔친 돈 때문에 대문 앞을 맴돌던 아이는 큰오빠였다. 그 시각 큰오빠가 재첩을 들고 대문을 들어오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간혹 생각을 할 때마다 재첩이 손바닥에서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내는듯하고, 유유히 흘러가는 낙동강 물줄기가 내 마음 속에서는 요동을 쳤다.
아버지는 일찍이 소원이 하나 있었다. 지금이야 언감생심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싶다. 구포다리가 1933년에 준공되었으니 아버지가 딱 큰오빠 나이였다. 근처마을에서 열두 명 이상 자식을 둔 어르신들이 초대되어 개통식 테이프를 끊는 모습이 한없이 부러웠다. 열한 살 소년이 장차 자식 열두 명을 얻겠다는 꿈을 꾸었지만,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어머니가 구정물에 빠졌던 아이를 낳고부터 시름시름 앓다가 막내 하나를 더 얻고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여덟 명에서 좌절된 목표를 아버지는 평생 아쉬워했다.
내가 오빠 나이 때는 오빠대신 낙동강은 내차지였다. 팔남매에서 일곱 번째인 나는 농사일에서 아예 제외되었다. 아버지는 대동수문 근처에서 그때는 특수작물로 분류되던 수박, 가지 등의 채소 농사를 대규모로 하고 있었다. 당연히 형제들이 동원되었고, 오빠 셋 언니 셋을 둔 어린 나는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이랑 근처에는 가지도 못했다.
강에서 가장 친한 친구는 재첩이었다. 해질녘 땀에 젖은 수건을 걸치고 리어카를 끌고 들어온 큰오빠는 내가 들고 온 비닐봉지를 보고 늘 “애걔걔”를 되풀이했다. 내가 잡은 재첩은 구정물통 옆 바가지에 며칠이나 담겨있다 버려지곤 했다. 어머니 죽음으로 낙담한 아버지가 구포로 이사를 했다. 중학교 일학년에 다니던 나는 무슨 연유인지 전학을 못했다. 대중교통이 마땅치 않던 시절이라 대동수문과 구포나루를 오가는 나룻배를 타고 다니며 중학교를 마쳤다. 태풍이나 홍수 때는 나룻배가 발이 묶이는 바람에 친구 두세 명과 비를 쫄딱 맞으며 구포다리를 건너곤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낙동강을 눈에 담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룻배는 추억에만 남았지만, 개근상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낙동강 품에 가족 누구보다 오래 머문 건 행운이었다.
몇 년 전 뒷산에 있던 어머니 산소마저 사라졌다. 그 옛날 아버지가 집과 농토를 모두 정리하는 바람에 고향에 남아있던 우리형제들의 마지막 연고의 땅이었다. 도로가 뚫리고 산소가 수용되면서 한 가닥 남아있던 가족인연이 더는 강을 넘나들 수 없게 되었다.
낙동강 건너에 텃밭 마련은 참 잘한 일이다. 농사철이면 밭 주변에는 얼쩡거리지도 못하고 강변에서 재첩 잡고 필기 뽑던 아이가 제법 텃밭농부가 되었다.
형제 중 위에서 두 번째인 큰오빠는 눈이 제일 컸다. 큰 눈만큼 겁이 많았다. 나는 아래서 두 번째였다. 형제사이 끈끈한 끈 중 큰오빠와 나는 한 가닥이 더 얽혔나보다. 큰오빠만 유일하게 세상을 서둘러 떠났고, 그로부터 얼마 있지 않아 신문은 ‘낙동강 재첩이 돌아왔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큰오빠 고맙습니다.”
텃밭에 가느라 구포다리를 건너고 있다. 옛 구포다리도 나루터도 사라지고 없지만 내 마음에는 그대로이다. 오늘도 푸른 물결 속에 놀고 있을 재첩에게 말을 건다. “난 절대 낙동강을 떠나지 않을 거야, 너도 그래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