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강 낙동강 수필 공모전 우수상목록으로
그 시절 청정지역 낙동강 치등섬
이승화나는 낙동강 물을 먹고 자랐다. 1953년 경남 김해군 가락면 봉림리 738번지 해포도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곳 낙동강 하류에서 살았다. 고향을 떠나온 지 50년이 훨씬 지났건만, 옛 주소가 고향의 흔적으로 술술 외워지는 것이 신통하다.
낙동강의 발원지 태백에서 700리를 흘러 흘러 마지막 바다와 만나는 녹산 수문옆 노적봉이 있는 곳까지는 5km 남짓한 곳에 위치한 서낙동강 하류이다. 그때는 굳이 서낙동강이라 하지 않고 낙동강이라 하였으며, 동네 사람들은 그냥 강이라 했다. 구포다리를 건널 때 보았던 힘차게 밀려오는 그 황토물이 우리 동네 강으로 흐르지 않고, 하구언 쪽으로 흐르는 원줄기라는 것을 안 것은 중학교에 가서였다. 어릴 때 내가 본 우리 동네 낙동강은 강 건너 저쪽 마을이 아득히 멀었고, 미루나무와 갈대의 푸르름만 어슴푸레 보일 뿐, 저건니(저 건너, 강 건너)의 마을은 내게 미지의 세상이었다.
강물이 밤새 바다 쪽으로 흘러갔다는 이치로, 이른 새벽에 첫 번째 두 번째 길러오는 물은, 먹는 물두멍에 붓고 그다음 허드렛 물두멍을 채우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동네 아낙들이 물동이를 이고 강을 오가는 시간대에는 그 누구도 요강을 씻으러 강으로 나가면 안 되었다. 그것은 무언의 규칙이랄까 질서랄까 동네 사람 모두가 낙동강의 새벽 물은 식수로 인식되어 있었으므로, 해 뜨기 전 세수를 한다거나 빨래를 하면 안 되었다. 물긷는 엄마들 행렬이 끝나고, 해가 뜨면 이집 저집 아이들이 세수하러 강으로 나온다. 나의 유년 시절을 추억한다면 아침에 강으로 세수하러 갔을 때이다. 다슬기 잡아 돌로 두들겨 알갱이를 갈대 끝에 묶어 물에 담그면 빰시이(작은 까만 물고기)들이 돌 틈에서 나와 다슬기 알갱이에 톡톡 입질한다. 손끝이 간질간질하여 그 재미에 해는 중천에 뜨고,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는 소리에 그제서야 씻으러 들고 온 밥 소쿠리를 건진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물빛 새우가 폴닥폴닥 뛴다. 빠른 놈은 튀어나가고 몇 마리 갇혔다 해도 매끄럽고 빠른 새우는 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렇게 발이 저리도록 강가에서 놀았던 기억이 나의 어린 시절의 유일한 추억이다.
낮엔 빨래터이기도 하고, 낚시터이기도 했다. 낚싯대라야 장대로 만든 지렁이 밑밥이 고작이지만, 어른 허리 키만 한 장어도 낚아 올린다.
겨울 김장철엔 온 동네 김장배추 그 강에서 씻어 담았고, 특히 우리 집 장 담는 날은 해 뜨기 전에 소금물부터 녹여야 한다는 할머니의 지론에 더 이른 새벽부터 물을 긷는다.
강 건너 제도라는 마을과 우리 마을 사이에 삼각주가 있었는데 어른들은 그곳을 칫등(치등)이라 하였다. 치등은 청정 지역이다. 사람의 근접이 없었으므로 오직 갈대와 물새와 재첩만이 모래 반 조개 반이라 할 만큼 많았다. 씨알도 굵어 모시조개만 한 크기가 모래 속에 깔려있다. 어른들이 치등으로 조개잡이를 갈 때 여나뭇살(10세 전후) 어린 나도 매번 따라가 조개를 잡았다. 얕은 곳에서도 최대한 깊이를 가늠해 어깨와 오른쪽 귀까지는 물속에 담그고 왼손은 양푼이를 잡고, 오른손으로 모래 바닥을 긁는다. 손가락에 와 닿는 조개의 매끄러운 감각을 더듬어 큰 조개만 건져 올린다. 어른들은 양동이에 조개가 가득 차면, 지나가는 나룻배를 손짓으로 신호하며, 우리를 내려준 위치쯤 양동이를 밀고 다가가 배를 타고 나온다. 내가 잡아 온 한 됫박이나 될까 하는 양으로도 삶으면 우유 같은 뽀얀 국물이 우리 식구 한 끼 먹을 만큼은 되었다. 아버지는 조개알갱이로 만든 회무침을 참 좋아하셨다.
우리 동네 해포도엔 동척창고가 있다. 10여채의 적산가옥이 마을 가운데 있었으며, 강에는 일본사람들이 박아놓은 말뚝이 있었다. 동척 창고에 곡식을 실어 나를 때 배를 접안 하는 곳이었다. 또래 아이들은 그 말뚝을 잡고 물장구를 치다가 헤엄을 배웠으나, 나는 겁이 많아 말뚝을 놓지 못해 끝까지 개헤엄도 배우지 못했다.
겨울에는 강물이 얼면 스케이트를 타고 놀았다. 얼음물에 빠지는 사고도 종종 있었는데 누가 얼음에 빠졌다 하면 윗동네 아랫동네 모두 강가에 모여 구출 장면을 지켜본다. 누구 집 아이인지? 내 오빠인지? 내 동생인지? 애를 태우며 지켜보았다. 한해는 강 건너 제도 총각이 자전거를 타고 얼음 위로 건너오다 빠진 적이 있었다. 어른들이 긴 장대를 가까스로 밀어 넣어 간신히 구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 청년은 우리 집에서 아버지 옷으로 갈아입고, 구들목에서 이불을 덮고 웅크리고 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가끔 고깃배 그물 당기는 리듬에 동네가 떠들썩하기도 하고, 멱을 감고, 조개를 잡던 그 강물도 점점 이전 같지 않았다. 상류에 큰 공장들이 건설되면서 강물이 오염되어 농사도 못 짓겠다고 동네 어른들의 걱정하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중학교에 갈 무렵 집집마다 수도가 들어왔고, 더 이상 강물을 식수로 긷지 않아도 되었다.
어른이 된 지금 서부산 고속도로에서 가락IC 지점을 지나기 전 우리 동네 해포도가 지척에 보인다. 그 시절 청정지역 낙동강을 그리워하면서 아련했던 유년시절을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