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보는 1만개의 눈빛… 아 행복해 "

피프 10년 함께한 수영만 스크린

"5회때 빗속 관객 결코 잊지 못할 것

부산시민회관서 막올린 7회땐 못와"

조봉권기자 bgjoe@kookje.co.kr
| 입력 : 2005-10-05 21:39:58
| 본지 21면

이 바다내음. 저 웅장한 광안대교. 세계에서 가장 정열적인 관객들…. 보인다 보여. 그래! 나는 다시 부산에 온거야!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 바로 한국의 부산.

안녕, 나는 스크린이야. 그냥 스크린이 아니라 특별한 스크린이지. 부산국제영화제(PIFF)의 개막식과 폐막식 영화들을 모두 상영한 몸. 피프가 자랑하고 사랑하는 야외 영화상영 프로그램인 '오픈시네마'의 영화들을 관객들에게 지금까지 쭉 보여드린 그 영사막. 나는 바로 수영만 요트경기장 야외상영장의 대형스크린이야.

나는 부산 시민들에게 아주 특별한 스크린이지. 10년 전인 1996년 피프가 처음 열릴 때부터 지금까지, 영화제 절정의 순간마다 나와 함께 해주셨기 때문이지. 이건 부산의 많은 영화관에 살고 있는 100개에 가까운 다른 스크린 친구들도 인정해.

어느 때부터인가 한국 전체에서도 아주 특별한 존재가 되어 있었어. 매년 영화제 개·폐막식 때마다 한국의 모든 언론매체가 유명한 영화인들, 부산시민들, 관객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내 모습을 촬영해 한국 전역에 전해줬거든.

그런데…그런데 말야. 나는 요즘 기분이 더 좋아. 영화를 비추다 말고 하늘로 날아가버릴 것 같아. 왜냐고? 이제 피프는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 세계가 주목하는 영화제가 됐잖아. 세계의 영화인들이 모두 나를 알아본다고. 이러니 내가 기쁘지 않겠어? 덕분에 내 웃음소리도 변했버렸어. 이전에는 하하하! 하고 웃었는데 요즘에는 피피피! 프프프! 하고 크게 웃지.

올해 피프가 열돌이고 세계 각지에서 손님들도 더 많이 오시니까 내 소개를 좀 자세히 해야겠군.

이름은 대형스크린. 올해 12살이야. 고향은 스위스. 내 얼굴은 가로 24.9m 세로 13.5m야. 몸무게는 500㎏. 사실 나 혼자 부산에 오는 건 아냐. 내 몸을 쫙 펴서 고정시켜 주는 강철골조 그리고 특수스피커를 동반하고 오지. 그리고 내가 관객을 향해 하얀 색의 내 몸을 펼칠 때 내 등 뒤에는 바람을 막기 위해 나와 똑같은 크기의 회색 스크린이 뒤쪽으로 동시에 펼쳐지지. 내 형제들과 내 몸무게를 합치면 약 30곘. 움직일 때마다 컨테이너 3대가 필요해.

비는 아무리 와도 끄떡 없고 바람에도 강해. 바람의 속도가 초속 17m를 넘어서면 내 몸에 있는 자동감지시스템이 작동해서 강철골조와 함께 자동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이지. 1분30초면 내 몸을 앞으로 숙였다 일으켰다 할 수 있어. 사실 태풍이 칠 때 말고는 언제라도 영화를 틀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몸이야.

실은 내가 부산만 오는 게 아냐. 스위스 취리히에서 여름 한달 동안 취리히호수에 발을 담그고 영화를 상영하지. 피프가 끝나면 곧장 3주 동안 배를 타고 시드니로 가. 여기서는 하버브리지와 오페라하우스를 등지고 바다 위에 설치돼서 영화를 틀어.

그런데 세 도시 가운데 나는 부산이 제일 좋아. 왜냐? 오직 부산에서만 나는 땅위에 설치되거든. 취리히와 시드니에서는 강과 바다, 그러니까 물속에 서 있어야 한다고. 발 시려워.

부산이 가장 좋은 이유는 또 있지. 1996년 나는 처음 수영만 요트경기장에 섰지. 제1회 피프 때야. 개막식을 며칠 앞두고 설치를 끝냈는데, 세계의 갈매기들 중에 제일 정 많고 화끈하다는 부산갈매기가 내 몸에 내려앉아 이야기를 들려주더라고. 제1회 피프를 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했고 얼마나 많은 피땀이 흘렀는지. 좌초될 위기가 몇 번이나 지나갔고 부산 시민들의 기대가 크긴 하지만 아직 어느 누구도 성공을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고.

드디어 제1회 피프 개막식이 열리고 불꽃놀이 속에 내가 완전히 몸을 일으켜 영화상영 준비를 끝내고. 1회 영화제 개막작인 마이크 리 감독의 '비밀과 거짓말'이 영사기에서 출발해 내 가슴 팍에 도착해 쫙 펼쳐지는 순간. 그 때야 감고 있던 눈을 뜬 나는, 아! 감동했어. 나를 보고 있는 5000명의 관객, 1만개의 눈빛들. 그 눈빛 속에 담겨 내게 전달되던 행복감.

관객들의 열정에 내가 놀란 것은 그 뒤로도 한 두번이 아냐. 5회 영화제 때 일이지. 내가 지금도 좋아하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어둠 속의 댄서'를 야외상영장에서 틀기로 돼 있었지. 그런데 아침부터 장대비가 쏟아지는 거야.

사실 나는 그 때 하루 쉬게 될 줄 알았거든. 오후까지도 비가 그치지 않아 영화제측도 '상영은 강행하되 환불을 보장하자'며 포기하는 심정으로 영화를 상영을 하더라고.

그날 상영시간이 다가와 내가 준비를 하느라 저녁 늦게 눈을 떴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지. 추적거리는 차가운 가을비 속에 비옷을 입고 자리를 지키며 영화 상영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야! 뭐 이런 관객들이 다 있냐.

이 영화제는 되겠다. 세계적인 영화제가 되겠다. 관객의 열정이 이렇게 뜨거운데. 해마다 야외상영이 시작되면 날이 좀 추워도 옷을 껴입고, 체조를 해가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 야외상영이 주는 작은 불편함 쯤은 기꺼이 감수하며 영화에 빠져드는 사람들.

나는 해마다 봐왔지. 내가 부산에 못 온 것은 딱 한번, 제7회 피프 때야. 그 때는 부산시민회관에서 개막식을 했기 때문이지. 많은 사람들이 부산 벡스코에서 개막식을 했던 제6회 영화제 때 내가 오지 않았던 것으로 아는데, 천만의 말씀. 비록 개·폐막작은 실내에서 상영됐지만 그 영화를 몸으로 받아 관객에게 선사한 스크린인 바로 나였지.

그렇게 나는 피프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나도 변해왔어. 좀 더 성숙한 스크린으로. 올해는 영화제가 생긴 지 10년째. 눈물이 나려고 해.

10년 전 갓 발걸음을 뗐던 피프가 이제 세계가 주목하는 영화제가 된 거야. 감격스러워. 이제 피프는 더 발전하는 길만 남았어. 개·폐막식과 야외상영이 계속돼 나도 그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조봉권기자 bgjo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