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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모의 한국미술과 부산 <14> 부산미술의 개화

6·25 전후 새 미학 추구, 다양한 화풍 등장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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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0-11-28 19:3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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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의 작품'기다림'
정적이던 부산 미술은 6·25 전쟁을 전후로 동적으로 전환한다. 피란 온 화가들의 새 유형의 그림 즉, 야수파나 표현주의 같은 모던한 작품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자연주의적인 아카데미즘이나 인상주의적인 화풍에 만족했던 부산 화가들에게는 자극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부산의 미술가들은 이미 인근 경남지역 작가들까지 모아 경남미술교육연구회(1947년), 경남미술연구회(1948년) 등의 미술단체를 결성하였고, 6·25 발발 직전인 1950년 5월 경남미술연구회는 혁토사(赫土師)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범시켰다. 아마도 지역을 넘어 또 다른 미학적 가치를 추구하려는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한국사진의 거목인 임응식(1912~2001) 등이 합세해 사진까지 포함하는 단체로 거듭난다.

혁토사에는 서성찬 양달석 김윤민 김종식 김경 김영교 임호 등이 함께하여 "우리 민족의 생리적 체취에서 우러나오는 허식 없고 진실한 민족미술의 원형을 생각한다"고 선언했다. 이들을 한 울타리로 모이게 한 것은 풍토성과 사실적 자연주의이며 혁토사의 출현은 부산미술의 또 다른 분기점이 되었다.

이들은 1953년 재개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이후 소위 국전파와 비국전파로 나뉜다. 국전파에는 김봉기 김원갑 이림 이준 전혁림 등이, 비국전파에는 서성찬 김영교 김경 김윤민 김종식 임호 등이 있었다. 비국전파가 결성한 것이 토벽회다. 휴전이 다가올 즈음 부산 중구 남포동 창선파출소 옆 골목에 자리 잡은 '망향다방'과 부근 선술집 '곰보집'은 김경 임호 김종식과 피란 온 한묵 이시우 이중섭 등을 비롯한 예술인과 화가 지망생들의 회합장소였다. 외지에서 온 화가들의 우월감과 자부심 그리고 관료사회 및 경제계의 편향적 관심, 특히 중앙화단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경력 있는 작가들의 우월감 과시는 부산, 경남지역 화가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그리고 해군 종군화가단을 결성할 때도 부산지역 작가로는 양달석만 참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자 부산지역 화가들의 소외감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은 부산지역 작가들을 토벽 동인으로 결집하는 간접 요인이 됐다. 지역의 토박이 화가들은 김종식의 중구 대청동 집에 자주 모이던 1953년, 토벽 동인을 결성하고 그해 3월 22일부터 29일까지 중구 대청동 르네상스 다방에서 첫 번째 동인전을 열었다. 서성찬 김영교 김경 김종식 김윤민 임호 등이 참가했다. 이들은 외지작가들이 대한미협전, 후반기전, 기조전 등의 전람회를 열자 이들의 새로운 감각적 화풍에 대응하여 부산의 독특한 향토미를 작품에 구현하고자 했다. 그들은 동인 결성의 취지를 이렇게 밝혔다.
"제작은 우리에게 부과된 지상의 명령이다. 붓이 분질러지면 손가락으로 문대기도 하며, 판자 조각을 주워 화포로 대용해 가면서도 우리는 제작의 의의를 느낀다. 그것은 회화라는 것이 한 개 손끝으로 나타난 기교의 장난이 아니요, 엄숙하고도 진지한 행동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예술이라는 것이 부박한 유행성을 띤 것만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닐진대, 그것은 필경 새로운 자기 인식밖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여기에 우리들은 우리 민족의 생리적 체취에서 우러나오는 허식 없고 진실한 민족 미술의 원형을 생각한다. 가난하고 초라한 채 우리들의 작품을 대중 앞에 감히 펴놓는 소이는 전혀 여기에 있다."

토벽 동인은 1953년 10월 4일부터 11일까지 두 번째 전시를 피가로 다방에서 열었다. 이때 임호와 김경이 서정찬의 작품을 전시하지 않아 불참하게 되었다. 그런데 서정찬의 작품을 출품하지 않은 이유가 조형적 이념보다 단순하게 다른 작가들의 작품은 20호 내외인데 서성찬의 작품만 50~60호여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제3회전은 1954년 6월 마지막으로 열렸다. 토벽이 단명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김경과 임호의 리얼리즘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이었다. 이 문제로 두 사람은 재떨이를 던질 정도로 격렬하게 논쟁을 주고받으면서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정규에 의하면 "부산 피란으로 인해 지방화가와 중앙화가 운운하면서 말썽이 있었던 것이 이 토벽전으로 말미암아 적지 않게 해소된 것은 무엇보다 기쁜 일"이라며 반겼다.

국민대 초빙교수·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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